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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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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강유, 자는 백약. 서위의 우문태는 강유를 개명왕으로 추봉하기도 하였다. 양주 천수군 기현 출신.


한국의 삼국지연의에 큰 영향을 준 모종강본 삼국지연의는 총 120회인데, 105회부터 119회까지 강유가 주인공이라고 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이는 전체 1/8에 해당한다.)

물론 유비는 1회부터 85회까지, 제갈량은 36회부터 104회까지 언급되니 연의상 급은 그리 높지 않다고 생각할수도.


촉한으로 귀순하기 이전 아버지 강경이 강인의 침략을 막던 도중 사망하였고, 강유는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아 중랑에 임명된다.


"維為人好立功名,陰養死士,不脩布衣之業"

-> 강유는 입신 양명에 관심이 있어, 은밀히 자신을 위해 죽을 수 있는 병사들을 키우고, 평범한 일에는 괸심이 없다.

<정사 강유전 중>

어려서 부터 자신의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는 해석이다.


1. 강유의 촉 귀순


정사 강유전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제갈량2.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폐하, 신 제갈량 선제의 뜻을 받들어 위를 토멸하러 갑니다. 


유선.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상부! 잘다뉴와요! 집 잘지키고 있을게요!



제갈량의 첫 북벌 시기의 일이다.



중국 신하.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태수님, 제갈량이 쳐들어오는데 우리 군현이 호응하기로 했다는데요?


마준.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천수태수 마준)
엥? 진짜? ㅅㅂ ㅈ됐네, 니네도 한패 아니야?


중국 신하.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 저희가 한패면 말을 해줬겠어요?

마준.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아 몰라 나 도망갈래 ㅌㅌㅌㅌㅌ

당시 마준은 강유, 양서, 윤상, 양건 등과 함께 천수군의 순찰을 돌고 있었는데, 제갈량의 공격 소식과 내부 호응 소문을 듣자 모두 믿을 수 없다고 의심하여 버리고 상규성으로 도주하여 은신한다. 


강유.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계십니까? 태수님, 양서 윤상이랑 같이 왔어요. 문좀 열어주세요.


마준.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꺼져 이 반역의 무리들아! 난 여기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강유.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아 ㅅㅂ.. 적군이 코앞인데 태수가 저지랄하고있네 어쩌지..
고향으로 가야겠다.


중국성.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우리 기현도 내부 분열이 무서워서 아무도 안받기로 했음. 딴데가서 알아보셈.

강유.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헝 어디로 가란 말이여


한편 제갈량의 북벌은 가정에서의 패배로 실패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장합.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장비가 없는 촉한은 나한테 안된다! 담당일진 할거임.


마속.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나는 언제 어디서나 등장하는 기승전마속! 초대 등산왕!


제갈량2.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이번 북벌은 실패다... 이대로 돌아가면 자원만 낭비되고 호응하기로 했던 양민들도 다수 죽을테니까

백성 좀 뽑아서 데려가야겠다.


강유.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저도 좀 데려가 주십시용!!

제갈량은 회군 당시 서현의 일천여 가를 뽑아 철수하는데, 이때 강유를 같이 데려가게 되고, 강유는 모친과 헤어졌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천수의 마준을 공격할 때 조운을 파견했는데, 강유가 제갈량의 계책을 간파하고 조운과 대등한 일기토를 벌인 것으로 문무를 겸비했음을 강조하여 화려하게 데뷔시킨다. (실제로 조운은 기곡에서 위나라의 본대와 대치하는 기만작전을 하고 있었다.)


배송지 주석의 <위략>에서는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마준에게 의심을 사 버려지고, 기현에 들어가자 기현에서는 크게 기뻐하며 항복 대표로 제갈량에게 보냈다고 되어 있다.


<자치통감>에서는 '강유가 제갈량에게 항복했다.' 라고만 서술되어 있다.


2. <위략>에서 서술한 모친의 귀환 설득


강유가 촉에 귀순한 이후 강유의 가족은 위나라 조정으로부터 강유를 다시 귀환시키라는 압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위나라 법은 투항자의 가족에게 매우 엄했다고 알려져 있다.)


강유의 모친은 강유에게 한약재를 보내는데,


당귀.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바로 당귀(當歸, 마땅히 돌아오다) 였다. 위나라로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였던 것.


이에 강유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시를 써서 모친에게 답장했다고 한다.


당귀원지.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원지(遠志) 또한 한약재의 일종인데, '원대한 뜻' 이라는 의미다. 자신의 원대한 뜻이 촉에 있으며 따라서 마땅히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강유가 귀환을 끝내 거부하여, 그의 가족들은 강유가 죽을 때 까지 사면받지 못하게 된다.


3. 제갈량의 신임


<촉서 강유전>에 따르면 제갈량이 승상부의 중임을 맡던 장예, 장완에게 강유를 칭찬한 내용의 편지를 보낸 기록이 있다.


"강백약은 그 시대의 일을 충성스럽고 근면하게 하며 사려가 정밀하며, 그가 갖고 있는 재능을 살펴보면, 영남(이소의 자) 및 계상(마량의 자) 등의 사람들도 그에게 미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양주의 상사(上士,뛰어난 선비)입니다. 반드시 먼저 중호보병 5, 6천 명을 그에게 훈련시키도록 해야 합니다. 강백약은 군사에 매우 능수능란하며, 도량과 의기가 있으며, 병사의 뜻을 깊이 이해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은 한실에 있으며, 재능은 일반 사람을 넘으므로 군사 훈련을 끝마치고 나서 궁궐로 보내 군주를 만나도록 해야 합니다."


중호보병은 조운이 맡았던 황실 경호병을 뜻하는 것인데, 적국의 장수를 경호대 훈련관으로 임명하자는 것과 황제를 만나게 한다는 것은 그만큼 강유를 차세대 유망주로 인지하며 신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후 230년 봄, 촉 장군직의 대대적 개편이 이루어지는데 

이때 강유는 한중공방전 당시 황충이 역임하고 있던 정서장군에 임명된다. 촉한의 정서장군은 한중과 북벌에 대한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직접적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정서대장군으로 위연이 있었으니, 직속부대로 단독작전에 임하는 것이 아닌 본대 지원임무 형식이었지 않냐는 견해도 있다.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 사후 위연이 후퇴를 거부하자 제갈량의 유지를 따라 양의와 함께 전군 후퇴를 지휘했으며, 사마의의 추격을 반격을 통해 저지했다고 서술했다. 이 시기쯤 되면 강유는 촉한의 군부 내에서 꽤나 높은 지위였다는 추측을 할 수 있겠다.

(뭐 제갈량 목상으로 사마의를 후퇴시켰다. 라는 내용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다만 논란이 있는 부분)


4. 장완, 비의의 시대


장완.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장완은 234년 제갈량 사후 제갈량의 뒤를 이어 촉의 대장군 겸 녹상서사가 된다. 강유는 보한장군 평양후가 되었다.


238년, 강유는 장완을 따라 한중에 주둔하였고, 239년 장완이 대사마에 오른 뒤에 강유는 그 아래 사마가 되어 서쪽의 강족과의 전투에서 소소한 전과를 올린다. 다만 <정사 곽회전>에 곽회가 강족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했던 기록을 보아, 촉한 또한 강족의 회유에 굉장한 노력을 들였을 것으로 보이며, 강유의 강족 공격은 위나라 쪽 강인이 아니었나 생각이 된다.


이후 장완은 242년 상용급습작전을 기획하는데, <촉서 장완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완은 예전에 제갈량(諸葛亮)이 여러 차례 진천(秦川)을 노렸으나 길이 험하고 군량운반이 어려워 끝내 성공할 수 없었으니 강을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주선(舟船,배)을 많이 만들고는 한수(漢水), 면수(沔水)를 따라 위흥(魏興), 상용(上庸)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작전이 시행되기 전 장완의 병이 악화되어 흐지부지되고, 촉한의 다수 관리들은 상용급습작전이 퇴로 확보가 어려워 실패 시 전멸할 수 있어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비의.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244년 위나라 조상이 10만의 군세로 한중을 공격하였을 때, 왕평이 흥세산에서 조상을 조져버리는 동안 병환이 매우 악화되어 업무를 볼 수조차 없던 장완 대신 비의가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본대를 이끌고 조상을 끝내 발라버린다. <촉서 왕평전>


당시 다른 제장들의 활약은 있으나 강유만이 빠져있는데, <왕평전>에서 촉군 수뇌부가 적극적으로 위군을 저지하자는 의견과 수성하자는 의견이 갈렸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강유는 수성의 역할을 맡은 것으로 추정된다.


장완의 사후, 강유는 247년 위장군에 올라 대장군 비의와 함께 상서의 사무를 총괄한다 <촉서 강유전>

촉한의 2대 황제 유선이 이때 친정을 선언하였으니, 제갈량과 장완 때와는 달리 재상들의 역할이 약해지는 시기였다.


위장군이 된 강유는 247년부터 249년까지 요화 등과 함께 농서, 남안, 금성의 경계에서 위나라에 반하는 강족과 더불어 싸웠는데,

이릉에서 인재를 다 갈아버린 촉한의 강유는 위나라의


하후패.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하후패


진태.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진태

곽회.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곽회, 그리고

등애.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등애 등 삼국지 후반 위나라의 S급들과 대전한다.


<촉서 강유전><화양국지> 등에 따르면 강유는 강족인 아차새 등과 함께 곽회-하후패를 격파했고, 그 여파로 강족의 수령인 치무대 등이 촉한에 귀순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위서 곽회전>의 기록으로 248년 결국 강유는 곽회에게 패퇴하고, 곽회가 강족 횐들의 잔당 1만여 부락을 항복시켜 평정하였다는 기록을 보아 끝내 최종적 승리로 가져가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유도 있던 것이, 대장군 비의의 언급으로 당시 강유의 어려움과 대단함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승상도 하지 못한 일(북벌)을 우리가 어찌 하겠는가, 내정을 튼튼하게 하고 제갈승상급의 인재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강유전 주석 한진춘추 내용 중>


이런 언급을 하며 강유에게 1만 안팎의 병력만을 내주었다 하니, 1만여의 병력으로 위나라 S급들과 대등한 싸움을 했다는 것 만으로도 높게 평가할 만 하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곽회는 우주방어 시스템으로 일관하던 사마의와는 달리, 옹량주의 위나라 행정력 확장을 지속적으로 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위,촉의 국경지대에서 위나라의 진정한 영역으로 변화하기 위한 노력) 강유로서는 어려움이 더했다.


좋은 기회이기도 했던 강족과의 연합작전은 북벌에 소극적인 비의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5. 강유의 시대, 적도 전투


비의가 죽고, 대장군과 익주자사의 자리는 그 누구도 물려받지 못한다. 이는 후주 유선의 신권 견제로 해석된다.


진지.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진지)

덕분에 내정에는 진지가, 군정으로는 강유가 통제하는 이원체제가 성립된다.

북벌에 리미트를 걸어제끼던 비의가 죽었으니, 강유에게는 그의 꿈을 실현할 좋은 때가 온 것.
다만 진지는.. 황호와 매우 친했다고 전해진다.


황호.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환관 황호)


뭐 황권의 입장에서 보면 신권과 황권의 융합이 적절히 유지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후주 유선이 내정에도 북벌에도 관심이 적어 큰 실책도 큰 성과도 없었다. <촉서 후주전>에 따르면 유선은 비의 사망 후 관제 개편 시기에 대사면을 시행하였는데, 이 점으로 보아 제갈량 대부터 내려오던 엄격한 법치주의가 무너져 국가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정확한 시간 기록은 없으나, 252년 전후로 예측되는 시기에는 제갈근의 아들이자 제갈량의 조카인 제갈각이 오나라에서 위나라의 신성으로 출병하는데, 당시 유선의 명을 받아 한중에 군사를 이끌고 갔다는 기록을 보면, 오와 촉의 연계작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유는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석영과 동정을 지나 남안을 포위하지만, 곽회의 뒤를 이은 옹주자사 진태의 우주방어를 뚫기에 버거웠으며

제갈각이 신성에서 위군에 대패하고 군량마저 떨어져 제갈량처럼 회군하게 된다.


254년 강유의 직책에 독중외군사를 더하고, 6월부터 10월까지 강유는 적도로 출병하여 엄청난 대승을 거둔다. 

이 전투에서 위나라 대촉 전담군인 정촉호군을 철저히 격파했고, 그 지휘관 서질의 목을 벤다. 이 승세를 틈타 하관현, 임도현까지 세 현의 많은 성들을 함락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하지만 역시 강유담당 일진 진태의 개입으로 촉의 선봉장 탕구장군 장억이 전사했으며, 전선을 더 유지하기 어렵다 판단한 강유는 적도, 하관, 임도현의 주민들을 촉한으로 데려와 면죽에 거처하게 했다. <촉서 후주전>


255년, 강유는 장익까지 대동해 수만명으로 다시 적도로 향하는데, 이 또한 대성공을 거둔다.

기산, 석영, 금성 세 군대로 진군한다며 제갈량처럼 기만작전을 했고, 경무장 한 수만명을 동원해 적도를 향한 전격전을 펼친다.

하지만 담당일진 진태는 이에 속지 않고 왕경더러 적도로 나아가 강유를 막고 지연시켜 자신이 당도하기를 기다리라 명한다.


하지만 강유는 진태가 도착할 시간을 주지 않고, 도수 서쪽에서 왕경을 격파해 위군 수만명을 죽였다.


왕경의 정예병사는 서쪽에서 실패하여 참사를 당했고, 적들의 사기는 더욱 왕성합니다. 승기를 탄 병사는 감당할 수 없고, 장군은 오합지졸로 방금 전쟁에서 진 군사들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졌으며, 농우는 매우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독사가 손을 물면 장사는 손을 자른다' 고 했고, 《손자병법》에서는 '군대가 공격하지 않는 적이 있으면, 지키지 않는 곳이 있다' 고 했습니다. 대체로 작은 손실로써 큰 것을 보존하는 까닭인 것입니다. 지금 농우의 재난은 독사에게 물린 것보다 심하고, 적도 땅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강유의 군대는 그의 예봉을 피할 수 있습니다. 요충지를 차지하고 안전하게 보존하면서 적의 쇠함을 기다린 연후에 진군하여 구조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것이 승리를 얻는 방법입니다.


<위서 진태전, 등애의 발언>


당시 적도에서의 패배는 <등애전>에 따르면 '옹주 전역이 촉한에게 함락 직전의 상태' 였다고 언급하고 있으니, 강유의 북벌전과는 제갈량보다 뛰어났다고 볼 수도 있겠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등애를 포함한 진태의 제장들이 옹주를 버리고 적이 지치기를 기다려 막아내자는 이야기를 하지만 진태가 반대하는 것을 보아 강유의 공적이 대단했다 할 수 있다.

어쨌든 왕경은 만여명을 수습해 적도성으로 들어갔고, 지금까지의 공적이 훼손될 수 있다며 회군하자는 장익의 말을 무시한 채 적도성을 포위하고 북벌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경무장한 병력의 전격전은 공성무기의 부족과 가져온 군량의 적음으로 적도성의 함락에 지연을 가져왔으며

진태의 군대가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강유도 결국 적도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 할 수밖에 없었다.

<자치통감>에 강유가 물러난 것은 9월 25일로, 당시 왕경이 진태에게 "식량이 열흘 분도 남지 않아 때에 이르러 구원병이 오지 않았다면 강유가 성을 들어 궤멸해 옹주를 손에 넣었을 것입니다."라고 진태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256년, 적도 전투의 승리로 대장군에 승진한 강유보리 수확기였던 여름에 군량을 확보해 다시 북벌원정에 나섰고, 한중도독 호제에게 상규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다. 당시 위나라는 강유가 재정비가 필요해 재침할거란 생각을 못했고, 담당일진 진태마저 강유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단 한명, 강유의 재침을 예상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등애' 다. 

(위나라의 인재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점이 촉한 입장에선 부러웠을 것.)


강유는 상규에서 호제의 군대를 만나 지원을 받고 군량을 보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이나

<자치통감>에서  '濟失期,不至'(호제가 기한을 놓쳐서 이르지 못했다) 고 했고, <강유전> 에서는

 '濟失誓不至'(호제가 약속을 어겨 이르지 못했다)고 하니, 어쨌든 호제가 강유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때문에 강유는 등애에게 단곡에서 대패를 하고 그동안의 전과를 대부분 상실한다.

<등애전>에서는 등애가 단곡에서 대승하였고, 촉장 10명과 천여명의 병사를 참했다고 기록했다.


호제가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1. 호제가 연공서열상 위인 강유를 일부러 ㅈ되게 하려 하였다.

2. 호제가 상규 진입의 타이밍을 놓쳤다.

3. 호제의 한중군을 중간에 위나라에서 차단하려 했다.


아무튼 강유 입장에서는 매우 아까운 일이 아니지 않나 싶다.


257년 위나라 제갈탄이 봉기한 틈을 타, 또다시 강유는 북벌에 나섰지만 등애는 방어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으며, 사마망의 적절한 지원과 차단 때문에 강유의 북벌은 또 지연된다. 


더구나 진지의 협조하에 초주가 <구국론>을 지어, 조위가 안정적이고 촉의 백성들이 전쟁에 피로를 느끼니 조위에 변란이 생길 때까지 촉한은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제갈탄의 반란이 변란이 아닌가?) 아무튼 당시 촉한이 건국되고 시일이 지나가니 안정을 추구하고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들이 나오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258년, 제갈탄의 봉기가 진압되자 강유는 또 다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촉으로 항복했던 하후패와 내정을 담당하던 진지가 같이 죽고, 촉한의 조정은 황호의 세상이 된다.


강유는 유선에게 황호를 처단하라고 주청하지만, 유선이 거절하면서 내정을 확고히 하기는 커녕 다시는 성도에 입성하지 않으려 했다.

<촉서 강유전>

그리고 이 시기 강유는 한중 공방전 당시 위연과 왕평이 확립했던 한중 우주방어 시스템을 손본다. 기존의 방어체제는 한중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한 방어전으로, 이는 방어가 매우 쉬우나 마찬가지로 역공을 하기가 힘들어 예전에 조상과 조진이 한중침공을 실패했던 것이다.


강유는 이 시스템으로는 위나라의 군대에 회복 불능의 타격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시스템을 수정할 것을 주장한다.


이 방법은 《주역》의 중문격탁(重門擊柝)에는 부합하지만(여러 진영을 교차시켜 수비하는 것은 방어할 수는 있지만) 큰 이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중략……만약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으면 여러 진영에서 모두 군사를 거두고 곡식을 모아 한성과 낙성으로 물러나 적이 평지로 들어오게 하고, 중요한 곳에 병사를 주둔시켜 수비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유사시에는 유격병을 투입해 빈틈을 노립니다……중략 ……적군은 관소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들에 흩어져 있는 식량이 없어 천리 떨어진 곳까지 식량을 운반해 와야 되므로 자연스레 피폐해질 것입니다. 적군이 퇴각하는 날, 여러 성에서 일제히 나와 유격대와 함께 힘을 합쳐 치도록 하십시오. 이것이 적군을 전멸시키는 방법입니다.

이에 독한중 호제는 물러나 한수에 주둔하게 하고, 감군 왕함은 낙성을 수비하고 호군 장빈은 한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서안(西安), 건위(建威), 무위(武衛), 석문(石門), 무성(武城), 건창(建昌), 임원(臨遠)에도 수비 거점을 마련하였다.

<촉서 강유전>

요약하자면, 한중의 주요 거점에 병력을 배치하고 광범위한 청야작전을 실행하여 적을 끌어들인 뒤 군량을 소진하면 후방을 차단해 전후포위작전으로 섬멸한다는 계획이다.
강유는 단곡 전투의 패배 이후로 위나라를 공격함으로써 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직관적인 성과가 없는 북벌로 인한 불만을 가라앉히고, 대규모 위군 침입 시 퇴각할 수 없게 만들어 북벌의 활로를 찾는다는 계획 자체는 좋았다.

이후 강유는 촉의 멸망까지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지는 않는다. 262년까지 강유는 황호의 세력이 두려워 성도에 들어가지 않고 답중에서 둔전한다. 설상가상으로 제갈첨과 동궐은 강유를 소환하여 익주자사로 삼고 병권을 뺏어야 한다고 표를 올리지만 후주는 강유를 대장군으로 그대로 놔두었다.

6. 촉의 멸망과 강유

사마소는 자꾸 귀찮게 구는 세력을 모두 제거해 사마씨의 왕조를 세울 목적으로, 촉나라 정벌 계획을 세운다. 

기밀유지를 위해 촉한 정벌에 대해서 종회하고만 상의했으며, <진서 문제기><자치통감>에 따르면 16만~18만의 대군을 편성하고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단행하였다.


종회.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종회)


사마소는 선박을 건조하여 오나라를 치는 것 처럼 기만하였고, 촉한에서는 위나라의 침공을 보고하지만

황호가 무당을 시켜 점괘를 보게 했더니, 위나라의 침공은 없을 것이라고 후주에게 진언해 후주는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는다.


사마소는 유선이 어리석기 때문에 강유를 답중에 붙잡아두고 검각만 돌파하면 촉을 끝내 정복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촉의 조정은 뒤늦게 위나라 군대가 공격한다는 것을 알았고, 한중이 돌파되자 요화를 강유가 있는 답중으로 보내고

장익과 동궐은 양안관구로 향한다.


강유는 답중에서 등애와 싸우다 패하고, 검각 방향으로 퇴각하던 중 공함곡에서 제갈서의 군대가 음평에서 퇴로를 차단했음을 알아챈다.

이에 강유는 역으로 위나라 방향으로 진격해 제갈서의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제갈서는 음평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으며 강유는 이 틈을 타 빠른 속도로 행군하여 음평을 지나 퇴각한다. 제갈서는 기만에 속았음을 알아챘으나 하루 차이로 강유를 놓치게 된다.


이후 요화의 군대와 합류한 강유는 양안관구를 지원하려고 하였으나, 내부의 반란으로 이미 종회의 군대에 휩쓸렸다는 것을 안 강유는

장익, 동궐과 함께 검각에서 농성한다. 


검각.pn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검각은 이런 곳이다. 여길 어떻게 뚫고 지나가..?)


종회와 강유는 검각에서 1개월에 걸친 공방을 펼치는데, 결국 종회는 검각 함락에 실패하자 강유를 회유하기 위해 편지를 쓴다.


"공후(公侯)는 문무의 덕을 갖추고 세상을 초월한 지략을 품고 공을 세워 파(巴), 한(漢)을 구제하여 화하에까지 명성을 드날렸으니 멀고 가까운 이들 중 그대의 명성에 귀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소. 늘 지난날을 생각하면 일찍이 (그대와 나는 위나라의) 큰 교화를 함께 입었으며 오찰과 정교가 우리의 우호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강유는 대꾸할 가치가 없다 생각했는지 검각을 방비할 뿐이었다.

점차 시일이 지나자 종회는 강유가 바꾸었던 시스템에 걸려들고 있었다. 제갈량이 보급 문제로 북벌에 실패했듯이 반대로 종회도 보급문제로 촉한 정벌을 실패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


종회의 전략은 백제의 멸망과 병자호란 처럼 주요 방어지점을 모두 우회하여 급속 진군하는 형태였고, 이는 살수대첩, 귀주대첩과 같이 실패하면 어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전략이다. 이를 종회가 모를리가 없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강유의 새로운 담당일진 등애는 경곡도를 거쳐 강유성으로 향하는 미친짓을 감행한다.


등산루트3.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EBS에서 방영되었던 등애의 등산루트, 등애의 군사가 등애의 목을 치지 않은 것이 미스테리)


등애는 이곳을 돌파해 면죽을 거쳐 성도를 위협하면, 검각의 강유가 퇴각할 것이라는 계산을 한다.

이런 미친짓을 하려 했으니, 공성무기도 없었고, 극심한 병력피해와 피로누적, 군량부족 등에 시달렸으나


강유성의 마막은 등애의 군대를 보자마자 저항한번 없이 등애에게 항복한다.

마막.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미친놈에게는 항복해야함. 아무렴 그렇고말고)


강유성에서 군을 정비한 등애는 면죽을 공격했고, 면죽에서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을 만나 사력을 다해 싸워 승리한다.

제갈첨.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지 애비의 절반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위군은 위태로운 상태, 종회군은 검각에서의 장기간 대치로 지쳐있었고, 성도의 방어와 병력 또한 여전히 굳건해

강유가 생각했던 청야전술은 성공을 하고 있었으며, 강유가 검각에서 나올 당시 각지의 촉군을 규합해 10만의 군세로 남하했다는 기록도 있고,

동쪽에 있던 염우는 나헌에게 수비를 맡기고 성도를 구원하러 오고 있었으며, 남만을 견제하던 곽익 또한 성도를 구원하려 오고 있었고


거기에 오나라 정봉도 세 갈래로 군을 일으켜, 두갈래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위군이 촉으로 더 몰려가지 못하게 견제했고 한 갈래는 촉을 직접 구원하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우리의 후주 유선은 항복하자고 주장한 단 한사람, 초주의 말을 듣고 등애에게 성도의 성문을 열어 항복한다.


초주.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촉한을 망하게 한 일등공신은 초주가 아니고 누구겠는가?)


강유 입장에서는 황호를 위시한 신하가 자신의 군정계획을 지속적으로 견제하고 무산시키고, 나라까지 팔았으니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7. 촉한의 부흥운동


검각에서 성도로 구원하러 이동하던 중, 후주의 항복을 듣자마자 강유는 종회에게 가 갑옷과 무기를 버리고 투항했고,

이를 본 강유의 제장들은 분노해 칼로 돌을 내리쳤다고 전해진다.


종회는 강유를 열렬하게 환영하여 <진기>에 따르면 종회가 "강백약, 왜이리 늦으셨소?" 라고 묻자 강유가 정색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사람을 오늘 보시는 것 만도 빠른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종회는 극심한 제갈량 빠로서, 촉의 항복을 받아낸 이후 제갈량의 묘에 찾아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는 모두 강유의 큰그림 이었던 것. 진행시키는 속도를 보아 검각에서 나오면서 이미 촉한이 항복한 형국까지 예측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아무튼 강유는 종회의 야망을 이용해 등애를 참언하여 가두게 하고, 종회의 세력으로 하여금 촉한을 부흥시킬 계획을 세운다.


"듣건대 군께서는 회남에서부터 그 계책에 허점이 없었다고 합니다. 진나라가 창대해진 것은 모두 그 덕택입니다. 이렇게 촉나라까지 정복하여 그 위엄과 덕망이 세상에 진동하니 백성들은 그 공을 존경하고 군주도 그 지모를 두려워할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어찌 이대로 돌아가려 하십니까? 한신은 한나라를 배반하지 않았어도 천하가 평정되자 의심을 받았으며 문종은 범려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가 허망하게 죽었습니다. 그들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었겠습니까? 이해관계가 그런 겁니다. 군께선 이미 엄청난 공과 덕을 이루셨으니 도주공(陶朱公=범려)이 배를 띄워 월왕 구천을 떠난 것을 본받아야지 않겠습니까? 공훈과 몸을 보전하려면 아미산(峨嵋山)에 올라 장량처럼 신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가야지 않겠습니까?"

종회가 말했다.

"그대의 말이 심오하여 내가 능히 행할 수 없소. 또한 지금을 위한 방도로 혹 아직 다 말하지 않은 것이 있는 것 같소."

강유가 말했다,


"그 나머지 방도야 그대의 지력으로 능히 헤아릴 수 있으니 이 늙은이(老夫)가 번거로이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강유전 주석 한진춘추>


강유2.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종회님, 우리가 나라를 세우려면 지금 데리고 계시는 아문기독 이상의 장수들 모두를 죽여야 함.ㅇㅇ.


종회.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아니 이보쇼 그건 너무 잔인하자나.


강유2.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근데 그렇게 안하면 어떻게 하실거?

종회.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그건 그렇기는 하지만..(머뭇머뭇)

종회는 강유의 진언에도 머뭇거렸고, 결국 위나라 병사들에게 종회가 자신들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퍼져 병란이 일어난다.


종회.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강유야! ㅈ됐다! 애들이 우리 죽이러 온대 어떻게해야댐?


강유2.jpg 공명의 정신적 후계자, 강유
(뭔 병 신같은 새끼를 잘못 선택해서..ㅅㅂ..)
어쩔 수 없음 싸워야됨. ㄱㄱ

하지만 자신들 휘하 병사들에게 무기를 지급하던 중 위군이 몰려들어 강유는 직접 대여섯을 베어내어 분전했으나 살해되고 만다.


강유는 제갈량이 출사한 27세에 촉으로 귀순해

유비가 죽은 나이인 63세에 숨을 거둔다


8. 강유에 대한 평가


강유는 촉한의 항복 직후 종회와 접선하며 후주 유선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고 한다.


願陛下忍數日之辱,臣欲使社稷危而復安,日月幽而復明。

폐하께서는 며칠만 고생을 참아 주십시오.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세워서 어두워진 일월(日月)이 다시 빛나도록 하겠습니다.


항장 출신으로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준 제갈량의 밑에서 성장해 끝까지 촉한을 위해 충성한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당시 촉(蜀)의 관속들이 모두 천하의 영준(英俊, 영민하고 준수함)이나 강유보다 나은 자는 없었다.

<배송지, 세어(世語)>


종회는 강유와 함께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은 수레를 타고 좌정할 때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장사(長史) 두예에게 말했다,

"백약(강유)을 중원의 명사에 비교하자면 공휴(제갈탄)나 태초(하후현)가 그보다 더 낫지는 못할 것이오."

<종회전>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를 만났기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

(주위의) 식견 있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등애전>


'전란이 끊이지 않으면 스스로를 불태운다'고 하더니 백약을 두고 하는 말이로구나. 지모가 적보다 뛰어나지 않고 역량도 적으면서 용병이 끊이지 않으니 어찌 스스로를 보존하리? 시경에서 말하는 '나보다 앞서지도 않고, 나보다 뒤서지도 않았다(不自我先, 不自我後)’라는 것이 바로 지금의 일을 가리키는 것이로다"

<적도출병 당시 요화의 평가, 한진춘추>


<화양국지> 등에서도 강유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고, <자치통감>의 주를 단 호삼성 또한 강유를 촉한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다. 라고 평했으며, 조선시대 문신 홍대용도 <담헌서>에서 강유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반면 배송지는 강유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으며, 중국의 근대사학자 여사면은 자신의 저서 <삼국사화>에서 강유에게 촉한 멸망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억울한 일이다. 라며 옹호한다.


물론 평가는 펨붕이들의 몫이다.


정말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추천은 글쓴이에게 힘이 됩니다.



*출처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best&search_target=member_srl&document_srl=3168368217&search_keyword=1084422820&listStyle=webzine&page=1



4 Comments
데미언릴라드 2020.10.28 13:55  
마속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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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예나 2020.10.28 14:31  
강유가 촉한의 마지막 에이스이자 공명의 후계자 였으나 잘봐줘야 촉정벌을 위해 파견된 종회나 등애급으로 생각함

개인적인 평가는 <화양국지> 등에서도 강유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고, <자치통감>의 주를 단 호삼성 또한 강유를 촉한을 망하게 한 장본인이다. 와 동일하게 생각함.

물론 그 누가 있어도 강유 이상으로 활약하진 못했겠지만, 촉이 더 빨리 망하게 한점은 강유의 책임도 있다고 봄

비위가 말한 승상도 하지 못할 일을 어찌 할 수 있단 말인가에 동의함

제갈량이 사망한 순간 삼국의 경쟁은 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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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t 2020.10.29 04:50  
[@최예나] 더 정확히 말하면 삼국의 경쟁이고 뭐고 조비가 가후 말대로 진득히 있으면서 촉오를 수면 밑에서 흔들기만 했으면 시간의 문제지 알아서 흡수합병 되었을지도 모를일임. 강유가 기개있고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을 맞지만 그래도 기반하나 없이 실력으로 올라갔다는 점에서 종회보다는 점수를 높게 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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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연이진리 2020.10.29 08:36  
삼국지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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