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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미국 4 3010 12 0

오늘은 조선국왕 중 재위기간이 3번째로 가장 짧은 왕 문종에 대해 알아보자

(문종의 재위는 27개월로, 짧은 순서 첫번째는 8개월의 인종이며, 두번째는 14개월의 예종이다.)


문종, 이름은 이향 1414년 태어나 1452년 39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재위기간은 2년 남짓이나

세종의 건강문제로 인한 대리청정 기간까지 합치면 약 10년 동안 조선을 통치했다.


문종.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지금에 와서야 인터넷 등을 통해 재평가 되고 있는 왕이지만, 예전에는 그냥 세종 -> 세조 집권 중간에 껴 있는 허약한 왕으로 알려져 있었다.


문종은 조선 국왕 중 최초의 적장자 자격을 가졌고, 1421년 8살의 어린 나이에 세자가 되었지만,

약 30년동안 계속 세자의 신분으로 지낸다. 

(조선시대 세자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 52일인 세종이고, 가장 긴 왕이 문종이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종의 실질적 통치기간인 10년 동안 무엇을 했느냐 하면, 대표적으로 두가지가 있는데

'측우기', 와 '신기전' 의 발명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1. 측우기

측우기.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금영측우기의 복원물, 부산 동래읍성 장영실 과학공원 내부 소장 中)


세종 통치기 농업에 참조하기 위해 각 지방의 강우량을 측정하여 보고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비가 온 후에 고여 있는 빗물의 깊이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토질에 따라 빗물이 스며드는 정도의 차이로 정보의 정확성이 떨어지자

세종 23년(1441년) 음력 8월 장영실을 시켜 서운관에서 빗물을 측정할 수 있는 기구를 처음으로 제작하게 명하였고, 한양에서 시범시행하였다.

세종 24년(1442년)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확립, 서운관에서 빗물의 깊이를 측량,기록하게 하였고 지방에서는 각 관아의 뜰에 설치하여 수령 본인이 측량 및 기록하게 하였다. (쇠, 구리등으로 만들기도 하였지만 도자기, 자기 등으로 대용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베네데토 카스텔리'의 측우기보다 무려 200년이나 먼저 세계 최초로 발명되었다.

(베네데토 카스텔리는 태양의 흑점을 관측할 수 있는 태양경을 설계한 서양의 천문학,과학자다.)


이 측우기가 영화나 교과서 등에 흔히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인식이 있는데


"세자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비 온 뒤에 땅을 파서 젖어 들어간 깊이를 재었으나 정확하게 푼수를 알 수 없어 구리로 만든 원통형 기구를 궁중에 설치하고, 여기에 고인 빗물의 푼수를 조사했다"

<세종실록 23년 4월 을미>


이는 측우기가 문종과 세종, 장영실과 호조의 관리들이 모두 관여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대구 선화당(대구 경상감영), 창덕궁, 통영 등에서 당시의 측우기를 볼 수 있다. )마전교.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현재의 청계천 마전교. 이곳에는 세종 시기 강우량을 측정하는 수표를 설치했다고 한다.)


발명의 날.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대한민국에서 지정한 5월 19일인 발명의 날은 측우기를 발명해서 처음 측정한 날인 1441년 5월 19일을 기준으로 지정되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행사일은 매번 다르다.)


2. 신기전

(미국에서 재현한 신기전, 출처는 에펨코리아 포텐 글 내용 中, https://www.fmkorea.com/3131723084

한국에서는 빛돌이 엑스포 라고 다들 기억하는...?(1993년) 대전엑스포에서 최초로 재현하였다.)


신기전은 고려 최무선의 로켓병기인 주화(走火, 달리는 불꽃)이라는 병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 거북선과 함께 비장의 무기로 활용되었고, 행주대첩에서도 크게 공헌하였으나

화약의 소모량이 크고 명중률이 생각보다 낮아 대대적으로 활용하기에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신기전.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영화 '신기전'은 지나친 국뽕과 허구가 들어간 영화이므로 흥미와 사실을 구별하는 분별력이 필요하다.)


1448년(세종 30년, 문종대리청정시기)에 제작되었고, 현재의 다연장 로켓포의 원리를 어느정도 가지고 있으며

<신기전기><국조오례서례>의 <병기도설>에 설계도와 테스트, 실용화 결과자료 등을 가지고 있는 복원 발사가 가능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로켓화기이다.

소,중,대,산화 신기전 등으로 발사 로켓의 규모와 화력, 용도에 따라 구분되었다.


문종은 상당한 밀덕(밀리터리 덕후)로 알려져 있다.

"주상께서 경연 중 병법과 병기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시어 신료들이 이를 자주 염려하였다."

<문종실록 , 1450년>

(경연은 국왕에게 유학의 경서와 사서에 대해 간의를 하고 토론을 하는 학술제도인데, 군사에 관련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고 오히려 피했다.)


1450년 3월에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는데, 다음달 4월 문종은 바로 의정부에 명하여 '동국병감'을 편찬하게 한다.


동국병감.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동국병감)

상 , 하권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전쟁사를 기록한 서책으로

현재 전쟁사 연구와 교과서 제작에 참고가 되고 있다.


동국병감의 목차를 살펴보면 

상권

1. 한무제의 침략

2. 고구려와 선비족

3. 고구려와 한나라

4. 고구려의 요동 공격

5. 고구려와 한족

6. 위 관구검의 침입

7. 연 모용외의 침입

8. 모용황의 환도성 침입

9. 수 문제의 고구려 침입

10~11. 수 양제의 고구려 침입

12~13. 당 태종의 고구려 침입

14. 나당연합의 백제 침입

15. 나당연합의 고구려 침입

16. 고구려 멸망

17. 나당전쟁

18~20 거란과 고려의 전쟁 1,2,3


하권

21. 고려의 여진정벌

22. 단적의 고려 침입

23. 김희재의 동진 침입

24~29. 몽고의 고려 침입 1,2,3,4,5,6

30. 고려의 합단 격파

31~32. 고려의 홍건적 격파

33. 나하추 격파

34. 덕흥군 축출

35. 동녕부 정벌

36. 호발도 축출


(현 교과서 및 참고서 등의 분류와 매우 유사한 것을 보아, 사학에 대한 당시 역량을 엿볼 수 있다.)


1450년 12월에는 군사적 목적의 국내 지도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 지도는 문종 사후 (세조 9년, 1463년)에 완성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실측지도 '동국지도' 이다.


동국지도.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동국지도 현 남부 3도 부분)


3. 기타 문종에 대한 썰과 그의 부인들.


문종은 살이 좀 쪘지만 당대 미의 기준으로 조선 왕들 중 손꼽히는 미남이라고 전해지며

병자호란 당시 궁궐이 불타고 난 후 어진이 발견되었을 때, 그 풍채와 용모를 보고 문종의 것인 줄 바로 알았다고도 하며

세자로 있던 당시 명나라에는 (계집애 비명을 지르는) 관우같은 용모와 수염을 지녔다고 소문이 났다 한다.


미남이었지만, 여복은 지지리도 없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첫번째 정실인 휘빈 김씨는 과도한 투기(부동산 투기가 아니라 질투심)로 인해 폐위되는데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발을 불에 태워 그 가루를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사랑을 받는다." 는 미신을 믿어 실천에 옮겼다고 한다.

(그 신발잿가루 때문에 문종의 수명이 단축됐다는 웃긴 이야기들도 있다.)


두번째 정실인 순빈 봉씨는 궁궐 내 궁녀들과 동성애로 인해 파문을 일으켰고,

아가씨.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영화 '아가씨' 中)


거기다 임신하였다가 유산이 되었다고 구라를 친 것이 의금부에 들통이 나 역시 폐비 신세를 면치 못한다.

(문종이 평소 순빈 봉씨를 거들떠 보 지도 않았다고 한다. 잘생긴 차도남의 원조.)


세번째 정실인 후궁 출신 권씨 현덕황후는 단종을 낳고 바로 다음날 죽는다.

(단종의 이름은 이홍위 로, 이방원 이후로 백성들과 이름이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외자로 지었던 것과는 달리 특이하다.)


4. 문종의 사망과 독살에 관한 설


문종은 한국사 국왕 중 가장 위대하다고 평가되는 세종 아래에서 20년 이상 군주수업을 마친 현군 후보였으나, 아쉽게도 즉위 2년 몇개월만에 

고질병이었던 허리 위의 종기로 승하하게 되는데, 당시에는 지속적 치료와 휴식, 안정이 수반되어야 치료되는 질병이었다.(현재도 그렇긴하다.)


"황보인,김종서 등 신료들이 주상에게 회복을 위해 정사를 잠시 내려놓으라 청하였다."

<문종실록 1451년>


당시 신료들도 문종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고 주시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종의 독살설 주장에 대한 근거를 살펴보자.


내의 '전순의' 가 내전에서 나오면서 말하기를,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이 매우 아프셨으나, 저녁에 이르러 조금 덜하고 농즙이 흘러 나왔으므로, 두탕을 드렸더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음식의 맛을 조금 알겠구나'하셨다."

<문종실록 2년 (1452년) 5월 5일>


문종의 병세가 차도가 있고 두탕(콩죽이다)를 먹고 입맛도 어느정도 살아났다는 말이다. 위독한 병자라도 무언가를 먹으면 생존이 지속가능하다는 건 다들 어느정도 알거다.(간경화든 암이든 당뇨든 합병증으로 식사를 못하는 환자는 현재에도 사망할 확률이 급격하게 올라간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를 공부하거나 드라마를 보면서 아주 잘 아는 인물이 나온다.

바로 이방원의 피를 이어받아 이방원같이 행동한 인물

수양대군.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영화 '관상' 의 수양대군)


세조 수양대군 되시겠다.

수양대군은 엄청난 불교 신봉자로, 문종의 투병 시 의정부에서 명산,대천의 신에게 임금의 회복을 기도하도록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여기에 참석하였다.

물론 형님을 위해 기도를 드린다는게 뭐 나쁜 일인가, 다만 수양대군의 흥천사 가는 일행에 국왕의 도승지 강맹경이 참석했다는 것.

(도승지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국왕의 비서실장으로 국왕의 투병 시 종친을 따라 절에 가는 것이 상식상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의정부에서는 흥천사로 사람을 보내 도승지를 책망하였지만, 이 도승지가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돌아올 생각은 없고 우부승지 권준에게 자신의 업무를 모두 위임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러던 중 같은해 5월 8일 전순의가 다시 문종의 상태를 보고한다. (전순의는 계급이름이아니라 그 당시 내의원의 이름이다.)

"임금의 종기가 난 곳은 농즙이 흘러 지침이 저절로 뽑혔으므로, 오늘부터 처음으로 찌른 듯이 아프지 아니하여 평상시와 같습니다."

<문종실록 2년 (1452년) 5월 8일 경자)


이는 문종이 거의 회복되어 정사에 곧 복귀할 수 있을 거라는 말이다. 대신들은 이를 믿고 있었으나 궁궐 내 이상한 모습들이 보인다.

종기 환자든 다른 환자든 차가운 물(냉수)는 한의학에서 좋지 않다고 하는데, 문종에게 자꾸 냉수를 가져다 주는 모습들이 보였던 것.

이에 당시 이조판서 허후가 문종에게 긴 상소를 올린다.


"큰 종기를 앓고 난 후에는 3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 회복이 되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종기 난 곳은 날로 차도가 있으니 신 등은 모두 기뻐함이 한이 없습니다. 다시 날로 조심을 더하시고 움직이거나 노고하지 마시어 임금의 몸을 보전하소서. (중략) 종기가 갈증을 당기오니 이는 약을 먹어 속을 덥게 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중략) 또 듣건대, 내의원에서 십선산을 조제 하여 올렸다고 하는데, 이 약은 모름지기 술로서 타서 먹어야 하고 많이 먹어서는 아니 됩니다."

라고 하자 문종은 이미 알고 있다 라고 하며 듣지 않았다.


물론 갈증이 나니까 문종은 냉수를 찾고, 왕이 가져다 달라는데 안 들을 노릇도 없다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문종의 병세를 생각하면 곧이곧대로

명령만을 따라 행한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이틀 후 갑자기 문종의 병세가 급격하게 위급해 진다.


"임금의 병환이 위급하니, 직집현 김예몽 등이 내의와 더불어 사정전의 남랑에서 방서를 상고하고, 수양 대군 이하의 여러 종친이 모두 있었다. 모든 의료와 기도 등의 일은 강맹경이 다 수양 대군, 안평 대군 두 대군의 말을 받아 의정부에 고한 후에 이를 시행했는데, 임금의 병환이 오랫동안 낫지 않고 위중한 이유로써 금성 대군 이유 등을 나누어 보내어 여러 절에 기도를 하려다가 모두 시행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문종실록 2년(1452년) 5월 14일(병오)>


계속 차도가 있던 왕이 갑자기 위독해 진 것인데, 그때 되서야 김예몽과 전순의가 방서(의학서를) 찾아보고 있는 꼴인 것이다.

한가지 더 위의 실록 기록에 유심하게 봐야 될 대목은 문종의 위급함을 듣고 수양대군과 그 종친들은 모두 입궐한 상태인데, 대신들에 대한 내용이 일절 없다는 것이다. 이말은 즉슨 문종이 사투를 하는 위급한 시기에 수양대군 외 종친들이 문종의 치료를 주도했다는 말이다.


이후 같은 날 다음 실록기록엔


"유시에 임금이 강녕전에서 훙하시니, 춘추가 39세이셨다. 이때 대궐의 안팎이 통하지 아니하였는데, 오직 의관인 전순의,변한산, 최읍만이 날마다 나아와서 안부를 보살폈으나, 모두가 범용한 의원이므로 병증을 진찰할 줄은 알지 못하여, 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임금에게 활쏘는 것을 구경하고 사신에게 연회를 베풀도록까지 하였다. 종기의 화종이 터지므로 전순의 등이 은침으로써 종기를 따서 농즙을 두서너 홉쯤 짜내니 통층이 조금 그쳤으므로, (그들은) 밖에서 공공연히 말하기를, '3,4일만 기다리면 곧 병환이 완전히 나을 것입니다.' 하였다.

의정부와 육조에서는 날마다 임금의 기거를 물으니, 다만 대답하기를

'임금의 옥체가 오늘은 어제보다 나으니 날마다 건강이 회복되는 처지입니다.' 하였다."

<문종실록 2년 (1452년) 5월 14일(병오)>


대궐의 안팎이 통하지 않았다는 건 대신들이 직접 임금의 용안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이고,(드라마 '킹덤'의 경우처럼 말이다.)

오직 내의와 도승지만을 통해 왕의 병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내의들이 얼마나 시원찮았는지 사관조차 이들을 범용한 의원이라고 내리깔았다. (범용은 평범하고 변변치 못함을 뜻했다.) 종기환자에게 사신을 대접하고 활쏘기를 구경하게 방관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버텨내던 문종이 결국 승하하고 단종이 즉위하자, 의금부가 이를 조사한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전순의 등의 말에, 내의 전인귀 등과 더불어 함께 의논하여 약을 드렸다 하니 아울러 추문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인하여 아뢰기를,

'연전에 세종께서 불예 하였는데 대행 대왕께서 의정부로 하여금 궐내에 들어와서 자세히 의논하여 약을 쓰게 하였습니다. 지금 의원 등은 증세의 경중도 밝게 말하지 않아서 대신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고, 쓰는 약도 또 대신에게 물어보 지 않았으니 죄가 너무나 큽니다. 의정부에 내리어 의논하게 하소서.'

하였다. 황보인, 김종서 등이 말하기를,

'여러 의원이 모두 말하기를 평순하고 좋으시다 하기에 신 등이 듣고 그렇게 여겼는데, 뜻밖에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전인귀 등도 마땅히 아울러 추문하여야 합니다.'"

<단종실록 (1452년) 5월 17일 기유>


어의나 내의원이 책임지지 않으려면 세종이 앓아누웠을 때 문종이 했던 것처럼 대신들과 상의해서 약을 조제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 하지 않으면 국왕이 죽었을 때 본인이 책임을 면치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순의 등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오히려 문종의 병증을 은폐하려고 했으니 참형에 처하라고 단종에게 고하는 것이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전순의는 수종이니 중하게 참하되 시일을 기다리고, 변한산, 최읍은 1등을 감하여 장 1백대 유 3천리로 하고, 조경지,전인귀, 김길호, 조흥주, 정차량, 송첨은 장 90대를 때리소서.'

하였다. 정부에 의논하여 아울러 고신을 거두고, 전순의는 전의감 청직으로 정하고, 변한산, 최읍은 영사로 하고, 조경지, 조흥주, 전인귀, 김길호, 정차량, 송첨은 전대로 내의원에 사진하게 하였다."

<단종실록 (1452년) 5월 18일 경술>


임금을 죽음에 이르게 방관한 관련자들을 강력히 벌하라 의금부에서 논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관직을 조금 내리거나 그대로 일하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자 같은 날 대간(사간원, 사헌부)들이 들고 일어나 전순의를 처형해야 한다 지속적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김종서, 황인보 등 대신들조차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치 않았고, 도승지 강맹경은 이 언관들을 모두 꾸짖어 내보내라고 단종에게 말한다. 이로써 문종의 치료에 관여하던 모든 사람들은 엄벌을 피해간다.


그런데 1년 뒤, 전순의의 다른 잘못이 사헌부를 통해 밝혀진다.

" 또 아뢰기를, 

'허리 위에 종기는 비록 보통 사람이라도 마땅히 삼가고 조심하여야 할 바인데, 하물며 임금이겠습니까? 움직이는 것과 꿩 고기는 종기에 금기하는 것인데, 전순의가 문종께서 종기가 난 초기에 사신의 접대와 관사 등 모든 여러 가지 운동을 모두 해로움이 없다고 생각하였고, 이어서 구운 꿩 고기를 바치기에 이르면서도 꺼리지 않았습니다. (중략) 전순의는 의원으로서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여서 모두 계달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를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야 하는데, 특별히 말감에 따라서 다만 전의감 청지기로 정하였다가 얼마 안되어 내의원에 출사하도록 하시니, 심히 미편합니다."

<단종실록 6권 (1453년) 4월 27일 갑인>


이쯤되면 사간원은 전순의가 문종을 죽였다고 확신하고 있다. 왕의 안정을 방해하고, 궁궐 내 '방서'(의술서)에도 나와있는 종기 환자 금기음식인 꿩고기를 먹인것을 예로 들면서.


같은해 11월에 수양대군이 정변을 일으키고 단종을 폐위한 계유정난을 일으켜 즉위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더 의심할 수 밖에 없는 일이 생긴다.


식료찬요.jpg 빛을 발하지 못한 아쉬운 명군 문종과 독살설
(식료찬요)


조선 세조 6년(1460년) 왕실 어의가 된 전순의가 세조의 명에 따라 우리나라 최초의 식이요법서인 식료찬요를 편찬한다.


전순의는 세종대부터 전의감의 의관으로서 국왕의 건강을 담당했고 세종 사후 감직되는 등의 왕실에 충성한 사실이 있지만, 기록만 봤을 때는

문종의 죽음을 방관한 것은 맞는것 같기도 하다.

김종서, 황인보 등이 전순의의 처벌에 대해 무관심했던것을 보면 세조의 밀명을 받은 독살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결국 수양대군 세조도 예종이 비슷하게 죽음으로서 인과응보(?!)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말도 있다.


사료를 봤을땐 독살이라기 보단 환자 방조와 역행되는 식이요법으로 죽음을 유도했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랬다. 또는 저랬다. 라는 명확한 근거가 없으니


판단은 펨창들에게 맡긴다.


감사합니다.






- 참고해야 할 사실 -


조선시대 실록은 유교적 관념의 사관들에 의해 집필되었고, 그 객관성 또한 중요하게 여겨 국왕이 직접적으로 편찬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록 중 해석에 반드시 주의해야 할 2편이 있다면 바로 '단종실록'과 일제시대'순종실록'이다.


<단종실록>은 본래 <노산군일기>로서 폐위된 왕의 기록으로 남아있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 단종 묘호를 추증하고 <단종실록>으로 자리잡았다.

<단종실록>에는 종합 편찬된 일자와 편찬한 사관의 이름이 없다.

<단종실록>에서는 단종을 어리고 불안한 임금으로 서술했다.

(단종은 7살의 나이에도 대신들의 의견을 반박할 만큼 분별력이 있었다고 한다.)

<단종실록>에서는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을 어린 왕을 위시한 전횡으로 그리고 있다.

(단종실록과는 달리 김종서는 문종이 신임하고 단종을 탁고할 정도로 청렴한 신하였다고 한다.)

<단종실록>에서는 안평대군이 왕위찬탈을 위해 대신들과 결탁함을 강조하고 있다.

<단종실록>에서는 수양대군의 영웅적 면모와 우국충정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 단종실록을 보자.

세조가 말하기를,

"대행의 은덕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으랴. (중략) (문종이)'이정, 제갈량인들 어찌 수양보다 나을까?' 하였다. 또 일찍이 내궁에서 칭찬하기를, '수양은 비상한 사람이야.' 하였다. 대저 형제간에 우애하는 마음이 천성에서 나왔으니, 우리 형제가 이로써 감격하여 울기를 끝없이 하였다."

(중략)

대행왕께서 병환이 위중하자 좌우에 말하기를

"수양이 보고 싶다."

하였으나, 좌우에서 그릇 숙의로 알아듣고 마침내 부르지 않았는데, 대개 후사를 부탁하고자 함이었다.

<단종실록 1권, 5월 18일 경술>


이 실록내용이 세조의 눈치를 보았다는 반증이 '세조'라는 표현에서 나온다.

정종, 태종, 세종실록 어디에도 후대 왕의 묘호가 선대왕 실록에 쓰여지지 않는다. 심지어

연산군 일기에도 중종은 '진성대군'이라고 하지 중종이라고 표기하지 않으며, 광해군 일기 또한 인조를 '능양군'이라 표기한다.

사관이 세조의 압박을 받았거나, 이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후대에게 알리는 표시 정도로 생각된다.



*출처

https://www.fmkorea.com/index.php?mid=best&search_target=member_srl&document_srl=3140149821&search_keyword=1084422820&listStyle=webzine&page=1


4 Comments
락스유한 2020.10.28 10:13  
미국님 재밌는 글 잘 보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럭키포인트 25,965 개이득

말술소녀밍키 2020.10.28 13:19  
설명 감사합니다. 재밌게 잘보고 갑니다.

럭키포인트 10,656 개이득

애플 2020.10.28 13:36  
자료 너무 재밋드앙

럭키포인트 13,330 개이득

맥짱 2020.10.28 16:12  
잼나니까 긴것도 읽힘...

럭키포인트 11,273 개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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