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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 ep 11. 위나라의 명장 장합. 그런데, 주작으로도 명장급? Part 3

Kuat 9 352 10 0

장합은 제갈량의 5번의 북벌에서 공식적으로는 3번, 비전투 기록을 합치면 4번 관여하는데, 첫 타가 크리티컬이었던 점 때문에 마속의 무능함 뿐 아니라 촉한의 처참한 인재풀을 비꼬는 데 많이 사용되는 것을 감안해도 매우 인상깊은 노익장의 면모를 보여줍니다.




우선 제갈량의 1차북벌의 진행부터 간략하게 설명드리자면, 



1차 북벌의 진군로를 친절하게 그려놓은 지도가 있더군요.

 

고마워요 ㄴㅁ위키


1. ​촉한군 전체가 기곡으로 진출한다고 소문을 내고, 조운과 부장 등지가 일군을 이끌고 기곡으로 나아가자 미현에 주둔하던 조진이 본대를 이끌고 맞섭니다.



그러나..

 

조운은 양념일 뿐



우리의 제갈 승상은 처음부터 훼이크를 선보입니다. 


2. 제갈량의 본대는 기산을 통해 진격하고 조진이 포야도에서 시간을 빼앗기는 사이 천수, 안정, 남안 3군이 한나라에 넘어가는 사태가 벌어지죠. 


3. 상규의 곽회와 서량의 서막만이 치소를 지키고 있을 뿐인 상황에서 마속이 가정에 먼저 주둔함으로서 서량을 얻기위한 포석은 완료되었습니다. 


미끼 조운, 낚싯대 제갈량, 물고기통 마속(?)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관중(우부풍,장안,좌풍익)과 옹양 일대는 위나라에 포함된 지 채 10년도 되지 않았고, 이민족들이 많아 늘 관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던 탓에 위나라의 통제력이 더더욱 약했습니다. 하지만 남중의 맹획과 맹염도 고위직을 내리면서 촉한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인 우리의 제갈 승상은 장기적인 전투와 국력손실이 더 걱정이지 새로 받아들인 지역에 대한 통치는 잘 할 자신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라의 후유증인지​ 마속이 왕평의 반대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을 점거하지 않고 산으로 올라가서 진을 칩니다. 여기서부터가 파멸의 시작.



장합은 조예에게 직접 출병명령을 받고, 특진(特進)의 지위도 먼저 받고서 여러 군을 합쳐 5만의 군대를 이끌고 마속에게 나아갑니다.


**진(特進) : 말 그대로 특별히 내리는 비상설직으로서, 가관(加官)되는 직위에 해당합니다. 가관이란 한 마디로 정원 외 임명인데 보통 대국의 입장에서 소국을 먼저 정벌하러 나서는 게 대부분이니 해당 정벌국이나 반란세력의 위치에 따라서 보직이름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쪽의 오나라를 정벌하라는 의미에서 조휴는 정동대장군이었고, 조비가 황제일 때 조진은 정촉호군-촉나라를 정벌하는 사령관-이었던 것이 그 예입니다. 보통 고위직이면 한 자리 뿐인데 이 경우는 2품이지만 비상설직이니 임명자가 생긴다는 것부터가 정원 초과가 되어버리니, 가관(加官)에 해당합니다.


**장합이 왜 특진이라는 드문 특수직까지 받았느냐는 크게 2가지 이유가 있는데, 조예가 진압군 5만 명을 이곳저곳에서 끌어모았기 때문에 한 지역의 지역담당군과 같은 이름을 줄 수가 없었다는 점이 하나고(정서, 진서), 둘째는 그저 제 생각이지만 빠른 조직구성과 관리를 위해서 속관 숫자가 적은 장군직을 일부러 만들어서 준 것입니다. 보통 3품 이상 고위장군직이면 휘하에 손발이 되어줄 속관이 적게는 십 수 명에서 많게는 3,40명까지도 있는데 특진 지위는 주부(主簿), 공조사(功曹史), 문정장(門亭長), 문하서좌(門下書佐) 각 1명으로 달랑 4명이 전부입니다.



 

한마디로 시간 없으니까 빨랑 가서 일해!라는 악독 사장 조예



승진 아닌 승진을 미리 받고 가정에 도착해보니 마속은 남산 위에 진을 쳤고, 급도汲道를 끊고 대파해버립니다. 

 

흥 싱겁군



다만 왕평이 거느린 1천 군사만 북을 치며 자리를 지키니 매복을 염려한 장합은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서량을 완벽히 접수하겠다는 제갈량의 계획이 완전히 어그러지고 천수현 인근의 천여 가구만을 이주시키고 그대로 1차 북벌은 종료됩니다.


이후 촉한에 호응한 천수, 안정, 남안을 조진과 함께 직접 쳐서 평정하며 베테랑답게 깔끔한 마무리를 보여줍니다.


이에 고무된 조예는 


“도적 제갈량이 파촉巴蜀의 무리를 가지고, 울부짖는 호랑이의 군대에 대적했다. 장군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가지고, 향하는 곳마다 승리하고 평정하니, 짐朕이 이를 매우 기리노라. 식읍 천 호를 늘려, 전과 합쳐 4천3백 호가 되게 하라.” 


라고 극찬하며 장합에게 큰 상을 내립니다. 


이후 조예는 사마의로 형주에서 수군을 조련해서, 면수를 따라 오를 토벌하려한다며 장합에게 관중의 군대를 이끌고 사마의에게 절도(節度)를 받게 보냅니다.


그러나...


겨울이라 큰 배가 다니지 못했기에 방성(方城)으로 가서 주둔했다고 합니다.

 

왓더퍽



*방성은 섭현 남쪽 40리의 장산을 이르는 곳으로, 섭현 자체가 형주 동북쪽이자 예주의 경계선이니 남양과 허창의 중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


그렇게 좀 쉬나 싶었는데 가을이 되자마자 제갈량이 진창으로 2차북벌을 시도해옵니다.


그러자 조예가 역마를 보내서 장합을 급히 낙양으로 소환합니다. 심지어 어지간히 다급했는지 낙양 서북의 하남성까지 친림해서 주연을 베풀면서 장합을 전송했다고 할 정도니 겉으로는 주연의 형식을 띄었지만 근교라고 한들 낙양 밖으로 곧바로 행차해서 장합을 신경썼다는 겁니다.


 

화들짝!



1차 북벌에서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낸 장합에 대한 믿음이 커진 것에 더해 이번에도 서량의 호족들이 넘어가기라도 하면 마속같은 자살골이 나오지 않으면 당연히 진압에 오랜 시간과 물자가 들 것을 염려한 것이죠. 그와 비례해서 조운에게 낚였던 조진이 미덥지 않은 것도 이유 중 하나겠죠.


 

사장(조예)님 나빠요 ㅜㅜ




그래도 장합이 고생을 너무 많이 합니다. 228년 정월에 1차북벌 막으러 병력 소집해서 서량끝까지 진압하고 오고, 그 병력을 인솔해서 형주까지 가서 수군과 연계훈련 하다가, 2차북벌 소식 듣고 본인만 낙양을 거쳐서 다시 진압군 사령관으로 출동..


이번에 조예는 남북군사 3만 명과 황제 직속의 무위(武威), 궁중 경비의 호분(虎贲) 2개 영까지 함께 파견합니다. 기존 관중의 군대는 장합이 형주에 옮겨놨으니 당장 보낼 수 있는 병력이라고는 황제의 근위병과 도성 인근 남군과 북군 뿐이었으니 사실상 이 병력이 뚫리면 장안 일대를 잃을 가능성이 커지는 도박수죠. 


장합을 신임하는 것과는 별개로 최악의 가능성도 염려했는지 조예는 


장군이 이름을 기다리면 제갈량이 진창을 벌써 얻는 일은 없을 수 있겠소!” 라며 묻자


“신이 미처 이르지 않아도, 제갈량은 이미 달아났을 것이니, 손가락을 꼽아 계산하니 제갈량의 양식은 10일도 미치지 못합니다.” 


라고 호기롭게 답하는데, 과연 제갈량은 학소에게 20여 일을 허비하게 되고, 장합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진격해 남정에 도착하자 제갈량이 퇴각합니다. 


**이상한 점 2: 한중공방전에서 장합이 광석->양평을 동일 위치처럼 이상하게 기술한 것과 마찬가지로, 장합이 남정까지 진격했으면 제갈량이 물러나는 정도가 아니라 대판 붙었어야 정상입니다. 한중의 한복판이거든요. 아마 촉한군의 본대가 어차피 관중에서 물러나면 대군이 머물 곳이 없어 잔도를 따라 돌아가서 한중군 남정현까지는 가야 다시 주둔할 수 있으니 그렇게 후퇴한 것을 가지고 장합이 자기가 거기까지 쫓아갔다는 식으로 뻥튀기한 것은 아닐런지..




여튼 제갈량을 두 번 모두 성공적으로 쫓아낸 공을 치하하며 정서거기장군(征西車騎將軍)으로 임명합니다.



**원래 정서거기장군이란 직함은 존재하지않는데, 정서(서쪽을 정벌, 즉 촉한 정벌)의 이름을 이은 거기장군이라는 뜻을 그냥 한마디에 적어버린 오타일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 근거로 <진서>(晋書) <선제기>(宣帝紀)에서 장합은 거기장군(車騎將軍)이라고 기록되어 있음을 들죠.





여기서 쉬어가는 일화가 하나 등장하는데, 정확한 시점은 나오지 않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야전군 사령관 같은 장합에게 의외로 학자를 아끼고 좋아하는 면모가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고향 출신의 비담(卑湛)이 경학에 밝고 행실이 훌륭하다 하여 추천한 적이 있는데, 이에 조예가 


"지금 장군이 밖에서 군을 다스려도, 안으론 조정을 살피는구나. 짐이 장군의 뜻에 기뻐하여, 지금 비담을 뽑아 박사로 삼으리라.” 


라며 장합의 상주를 받아들였다고 하죠.



230년 8월, 대사마로 승진한 조진의 건의로 위나라가 처음으로 남벌을 시도합니다. 


조진은 야곡을 거쳐 포야도로, 장합은 자오도로, 사마의는 상용에서  한수를 거슬러 서성현으로 3로침공을 감행합니다. 제갈량은 이를 감지하고 한중 최동단에 해당하는 성고, 적판에 진을 치고 방어합니다.


그러나.. 장마로 인해 길이 끊기고 보급에 문제가 생겨 3로군은 철수해 버립니다.

 




그리고 대망의 4차 북벌이 231년 시작되는데,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선비 가비능을 부르자 북지군의 석성에 와서 호응하였다고 합니다.


조예는 병든 조진을 낙양에 부르고 사마의를 대촉전선의 책임자로 장안에 보냅니다.


곧바로 사마의는 비요와 대릉에게 정예병 4천을 주어서 천수군 상규현-기산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치는 현-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병력으로 기산으로 진군합니다.


장합이 병사를 나누어 옹(진창 바로 위), 미(오장원 옆)에 주둔시키려하자 사마의가 이를 반대하고 그냥 진격시킵니다.



이 때 제갈량은 군을 둘로 나누어 일군은 왕평에게 맡기고 기산을 공격하고, 자신이 다른 일군을 이끌고 상규에서 사마의와 격돌하려 합니다. 본래 상규 일대에는 보리밭이 있어 촉한군이 오기전에 베어버리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조예가 이를 가납하지 않아 멀쩡히 자라나고 익은 상태였습니다. 


제갈량은 보급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바로 이 보리를 수확하려 했고, 막으러 온 곽회와 비요를 요격하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한창 수확하던 도중 상규 동쪽에서 사마의의 본대와 마주하게 되고, 양군은 서로 진영을 정비하며 대치만 합니다. 곧 제갈량이 기산 방향으로 돌아가는데, 뒤를 쫓아 사마의가 노성에 도착합니다.


장합은


"저들이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습군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라며 사마의를 설득하려 하지만, 사마의는 따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곧 모든 제장들이 싸울 것을 청하자 5월 10일 장합vs왕평, 사마의vs제갈량의 빅매치가 벌어집니다.


여기서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데, <진서>는 사마의가, <한진춘추>는 제갈량이 이겼다고 하며 정사에는 사마의와 장합이 싸운 뒤 퇴각해 본진을 지켰다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길어요.)


다만 왕평vs장합은 왕평이 이긴 것이 확실합니다. 4번째 주작 혐의가 여기에서 나옵니다.


4-1. <장합전>에는 왕평과 싸웠다는 언급조차 없습니다. 


4-2. '<왕평전>에는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마속 건과는 다르게 왕평이 지형도, 전술도 우위인 상태에서 겨루었으니 장합이 진 것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장합이 졌다고 해서 위나라가 진 것은 아니기에 <장합전>에서는 언급조차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4차북벌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는 듯하지만 이 대목이 장합의 최후가 됩니다.


<위략魏略>에 의하면, 제갈량이 후퇴하자 사마의는 장합에게 추격을 명합니다. 


“군법에서, 성을 포위하며 반드시 빠져나갈 길을 열어두고, 돌아가는 군은 추격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라며 항변해보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고...


촉군이 높은 곳에서 숨어 궁노를 난사하자 넓적다에 맞고 사망합니다.


이렇게 3번의 북벌 저지와 한 번의 실패한 남벌을 남기고 장합은 231년 5월 세상을 떠납니다.

 



조예는 애석해하며 장합의 시호를 장후(壯侯)라 했다. 아들 장웅(張雄)이 후사를 이었다. 장합이 앞뒤로 정벌전에 공을 세웠으므로 조예는 장합의 봉호를 떼어내어 장합의 아들 4명을 열후에 봉했다. 어린 아들에게는 관내후의 작위를 내렸다. 



**장합의 아들이 아마 5명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아들 모두를 열후에 봉해주는 경우는 공신일지라도 흔한 일은 아닙니다. 보통 장남이 후사를 잇고(무관이나 문관 직위) 차남이 작위만 받거나(관내후~도향후) 그동안 아버지가 수고한 것을 기려 금품이나 하사품을 좀 받는 정도입니다. 이름뿐인 관내후가 아니라 식읍과 사유재산을 크게 가질 수 있는 열후에 모두 봉했다는 만큼 장합의 사망이 안타까웠다는 조예의 마음의 표현으로 보셔도 되겠습니다.



이렇게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위나라를 섬긴 명장 장합을 살펴보았습니다.

9 Comments
불량우유 2018.05.31 17:28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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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코리아 2018.05.31 17:37  
잘읽었습니다. 장합 후손들은 사마씨의 진나라가 들어서면서 어찌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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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t 2018.06.01 00:33  
[@바부코리아] 제가 알기로는 기록이 없습니다. 황조가 바뀌었다 한들 반란이나 정치판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후작위만 계승했다면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었을 것이고요. 혹시 뭔가 아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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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t 2018.06.01 00:48  
[@바부코리아] 장합의 맏아들이 장웅인것은 나오지만 나머지 4명의 아들은 이름조차 없이 공란입니다. 이러니 설령 존재했었어도 이름을 몰라 기록추적이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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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부코리아 2018.06.01 08:19  
[@Kuat] 아하..기록조차 없군요..ㄷㄷㄷ
휘바휘바 2018.05.31 19:49  
재밋게 잘읽엇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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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반 2018.05.31 20:52  
재밌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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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t 2018.06.01 03:20  
[@햇반] 혹시 원하시는 인물 리뷰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햇반 2018.06.01 22:17  
[@Kuat] 딱히 없네요 이렇게 시리즈 연재해주는것만으로 감지덕지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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