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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시절, 삼국의 실질적인 영토

미국 7 9186 14 0

 

흔히 알려진 삼국의 지도

 

 

 

 

 

 

 

 

 

 

실질적인 영토

 

  

 

촉은 파촉 익주 성도 정도 말곤 산지가 너무 많아서 실질적으로 지배할수 있는 영토는 색깔칠한곳이 전부인수준 

 

오는 땅떵어리랑 인구는 촉보단 큼 손오를 기점으로 해서 이제 강남일대가 개발이 된다라고 보면 됨 

 

그만큼 미개척지 이민족들이 들끓고 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가 부족에 시달리고 생산력도 낮았음 

 

위는 온난습윤한 황하끼고 있는 화북지방의 생산량을 바탕으로 촉의5배 오의 2배가 넘는 농업생산량을 자랑했음 

 

거기다 넘치는 인재 

 

학자들 중에는 천하의 7~8할을 위가 가졌다는 말도 있을 정도로 압도적이였음 

 

근데 그 넘치는 인재들에 의해 휘둘리다 나라 뻇김 

 


 

삼국시절 각 나라의 인구수 


위: 4.932.000명 

촉: 1.040,000명

오: 2,562,000명





한고조 유방과 유비를 비교하는 사람이 많은데,

말이 같은 파촉이지 유비는 촉한의 깊숙한 성도를 중심으로 한 파촉이었고,


항우가 유방을 내쫒은 곳은 한중임. 

여기도 물론 변방이었지만, 유비에 비한다면야...


또한 제갈량은 성도를 중심으로 군수물자와 병사를 조련했지만

유방이 한중에 자리잡은 것은 불과 5~6달정도에 유방을 따르던 병사 3만명.


이를 이끌고 삼진을 정벌하고 장안을 취하며 초한전쟁의 시작을 닦았음.

제갈량이 몇번이나 무리하며 북진하며 장안을 취하려 한것도 이 때문이고.. 

 성도에 갇혀있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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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1 Kuat  
기본적으로 위,촉,오 3국의 인구 조사는 후한 말(156년) 이후 한참을 못하다가 삼국이 각각 멸망할 즈음의 집계된 인구수가 본문의 인구수인 것인데, 100여 년의 시차가 있음에도 156년 중국 전토 인구가 5600만 가량이었는데 삼국의 멸망 시기에 다 합쳐서 천만이 채 안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서진 건국 이후 체계화가 좀 잡히면서 1600만의 인구가 통계상으로 잡히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후한 조사 인구와 서진 조사 인구가 그나마 정확한 편이라고 보는 것이, 이 두 조사는 중국이 통일된 왕조가 들어서고 시행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랑민이나 화전민, 도적, 이민족 등의 부정확한 요소들이 그나마 최소화되었을 타이밍이기 때문이죠.

또한 기본적으로 위촉오 3국이 모두 통계상 인구 외에 비공식 거주인구가 +a로 많이 있었던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촉한을 보자면, 제갈공명이 승상이자 초법적인 기구인 승상부를 운영하며 3국중 가장 효율좋고 촘촘한 행정망을 갖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남중 일대와 익주 북부의 일부 험준한 지형에는 가짓수를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이민족들이 또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대체적으로 한의 통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일반적인 촉한 백성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냐면 그건 아닙니다. 왕국 속의 공국 같은 느낌? 북벌이나 염정개발 같이 굵직한 사건들에는 촉한의 명령을 따르고 내항도독, 촉군속국도위 같은 지역 조정자들에게 대표자들을 보내서 교류하는 영주권자 집단 같은 존재랄까..해서 3국 중 가장 반란같은 내홍이 적긴 했지만, 워낙 넓은 지역에 하도 듬성듬성 퍼져있다보니 당시의 가장 이민족 친화적이고 훌륭한 행정망을 갖춘 촉한이라고 모든 이민족 인구수를 정확히 셀 도리는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오나라, 손책이 원술에게서 독립하여 둥지를 틀 그 시기부터 제갈각이 병력자원으로 전용하게 되는 240년대까지 수십 년간 오나라의 최대 근심거리이자 동시에 최고의 관심사는 산월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촉이나 오나 중원에서 보면 변방이지만, 성도평원과 도강언이라는 사기템을 가진 촉한에 비해서 오나라는 개발도 덜 되어 있고 안그래도 대를 이어서 중앙의 간섭 없이 방귀뀌던 대호족들이 드글드글한터라 아무리 손책, 손권이 대단해도 손가의 힘만으로 휘어잡을 수는 없었죠. 그래서 아예 방책을 대놓고 세병제를 통해서 호족친화정책을 폅니다. 작위와 식읍은 물론이고 수조권에 자체적인 병력동원까지 가능한 천국을 만들어줍니다. 반대급부는 군주(손권)의 영도아래 따를것이라는 단순한 요구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수백 년을 간섭없이 지역의 왕들처럼 살아온 호족들이다 보니 수많은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나라 역사를 보면 호족의 난이나 산월의 준동이 없는 해가 신기할 정도로 빽빽하거든요. 더구나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장강 이남은 개발의 손길조차 안닿은 오지 중의 생오지가 대부분이고, 이는 오나라 행정체계에 들어가지 않는 이민족+산월이 엄청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위나라의 미집계인구가 많은 이유는 크게 2가지입니다. 국경과 병호제. 먼저 국경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요. 서쪽의 량주부터, 하투를 거쳐서 병주 북부의 삭방, 오원일대와 기주, 유주 북부까지 수천 킬로미터의 사막 및 초원이 펼쳐진 위나라 국경에는 유목민족들이 엄청 많이 돌아다닙니다. 정주민족도 아니고 위나라 국민도 아니니 인구집계가 정확히 될리가 없죠. 형북일대 또한 한수 상류쪽으로는 온통 산과 이민족이 있었고, 예주 여남 밑은 넓고 험한 첨산 일대가, 여강~광릉까지는 장강을 맞대고 오나라와 마주보는 강으로 된 국경이 있죠. 지금처럼 선으로 된 국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시통제시스템이 있을 때도 아니니 국경 일대에서 위나라 안팎을 오가는 모든 집단을 다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두번째로 병호제인데, 오나라의 세병제가 군주에게 일임받은 호족 사병집단체제라면, 위나라의 병호제는 세습되는 징집국가병역입니다. 유민과 도적들을 그러모아서 가호를 만들어주고 전국에서 고아와 과부들을 모아서 호구를 완성해주는 반은 국민 반은 군인의 형태라고 할까요? 이들은 정식 인구조사에 안잡히는 것이 큽니다. 병력이 되는 정남 숫자만 계산되고 나머지는 통계상에서 제외된다고 봐야죠.
BEST 2 Kuat  
2번째 위촉오 3색지도에서조차 오나라는 사실 과대평가된 것이, 형남4군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은 붙여놨지만 그나마 장사가 인구수가 되는 수준이라 장사>영릉+계양+무릉이고, 4개 군을 합쳐봐야 강릉이나 시상 1군데만 못한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오나라를 놓고봤을 때 장강과 바로 붙은 지역을 도시라고 해줄만한 수준이라 그나마 꼽자면 강릉-무창(강하)-시상-건업(+단양)-오군 정도가 인구와 식량이 제대로 모이는 곳이고 그마저도 강릉은 뻑하면 위나라하고 싸우느라 안정되지를 못하고 동정호 평원은 산월과 무릉만이랑 치고박느라 개발도 안되고..시상은 수군 요충지기는 해도 도시나 생산기지로서 손꼽기에는 매우 남쪽에 치우쳐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나라에서 어지간한 지방관이 형주목이나 교주자사직을 맡고 중앙직으로 발돋움하는 경우보다 단양태수, 오군태수를 역임한 사람이 고위관직으로 올라가는게 더 정석이었고요. 이러니 1개주에 불과해도 한중-성도-파군에 걸쳐서 식량생산이 되고 중앙집권이 강한 촉한이 형주남부+양주+교주 3개주를 가졌으나 세병제로 중앙에 힘이 덜모이는 오나라의 절반 이상의 국력을 발휘했던 이유죠.
7 Comments
녁녁녁 2020.02.05 11:08  
사실상 원소vs조조가 통일전쟁이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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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t 2020.02.05 11:29  
[@녁녁녁] 고라췌. 심지어 원소가 급사해서 원상vs원담 구도가 생겼을 때도 조조가 먼저 건드리지 않았고 기다렸다가 헛바람 가득 든 원담이 조조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걸 명분으로 삼아서 하나씩 먹어 삼켰음.

오죽하면 조조가 반분된 원소 아들들을 이기고 나서 데미지를 입은 상태의 업(기주의 주도)을 들어가보고는 '와 인구와 식량소출이 장난 없다 헤헤 신난다!'라고 너무 좋아하니까 로컬 인사인 최염이 자중하라고 했을 정도로 기주 일대는 ㄹㅇ 하북을 대표하는 지역이었음.

흔히들 학문이 융성한 지역으로 공자묘가 있는 청주, 맹자묘가 있는 연주, 인구와 물산의 기주와 장강의 교통중심지인 형북(양양)을 꼽는데, 이 시기 그나마 장강일대에서 발전한게 형북일대라 망정이지 장강 이남 땅과 하류는 변방 중의 변방 취급을 받던 터라 개발도 제대로 안되어있었던 걸 감안하면 인구도 제일 많고 명문가들도 많이 위치한 하북, 개중에서도 기주지역을 모든 방면에서 첫손으로 꼽는데는 이견이 없을 것임. 오죽하면 조조의 고향이 예주 초현이고 헌제를 초반에 허창에 모셨음에도 원소 패밀리 토벌후에 본진을 업으로 옮겼을 정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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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t 2020.02.05 17:24  
기본적으로 위,촉,오 3국의 인구 조사는 후한 말(156년) 이후 한참을 못하다가 삼국이 각각 멸망할 즈음의 집계된 인구수가 본문의 인구수인 것인데, 100여 년의 시차가 있음에도 156년 중국 전토 인구가 5600만 가량이었는데 삼국의 멸망 시기에 다 합쳐서 천만이 채 안되는 것으로 나오지만 서진 건국 이후 체계화가 좀 잡히면서 1600만의 인구가 통계상으로 잡히게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후한 조사 인구와 서진 조사 인구가 그나마 정확한 편이라고 보는 것이, 이 두 조사는 중국이 통일된 왕조가 들어서고 시행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유랑민이나 화전민, 도적, 이민족 등의 부정확한 요소들이 그나마 최소화되었을 타이밍이기 때문이죠.

또한 기본적으로 위촉오 3국이 모두 통계상 인구 외에 비공식 거주인구가 +a로 많이 있었던 것이 확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촉한을 보자면, 제갈공명이 승상이자 초법적인 기구인 승상부를 운영하며 3국중 가장 효율좋고 촘촘한 행정망을 갖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남중 일대와 익주 북부의 일부 험준한 지형에는 가짓수를 셀 수 없을만큼 많은 이민족들이 또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대체적으로 한의 통치를 거부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일반적인 촉한 백성들과 같은 취급을 받았냐면 그건 아닙니다. 왕국 속의 공국 같은 느낌? 북벌이나 염정개발 같이 굵직한 사건들에는 촉한의 명령을 따르고 내항도독, 촉군속국도위 같은 지역 조정자들에게 대표자들을 보내서 교류하는 영주권자 집단 같은 존재랄까..해서 3국 중 가장 반란같은 내홍이 적긴 했지만, 워낙 넓은 지역에 하도 듬성듬성 퍼져있다보니 당시의 가장 이민족 친화적이고 훌륭한 행정망을 갖춘 촉한이라고 모든 이민족 인구수를 정확히 셀 도리는 없었습니다.

두번째로 오나라, 손책이 원술에게서 독립하여 둥지를 틀 그 시기부터 제갈각이 병력자원으로 전용하게 되는 240년대까지 수십 년간 오나라의 최대 근심거리이자 동시에 최고의 관심사는 산월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촉이나 오나 중원에서 보면 변방이지만, 성도평원과 도강언이라는 사기템을 가진 촉한에 비해서 오나라는 개발도 덜 되어 있고 안그래도 대를 이어서 중앙의 간섭 없이 방귀뀌던 대호족들이 드글드글한터라 아무리 손책, 손권이 대단해도 손가의 힘만으로 휘어잡을 수는 없었죠. 그래서 아예 방책을 대놓고 세병제를 통해서 호족친화정책을 폅니다. 작위와 식읍은 물론이고 수조권에 자체적인 병력동원까지 가능한 천국을 만들어줍니다. 반대급부는 군주(손권)의 영도아래 따를것이라는 단순한 요구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수백 년을 간섭없이 지역의 왕들처럼 살아온 호족들이다 보니 수많은 반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나라 역사를 보면 호족의 난이나 산월의 준동이 없는 해가 신기할 정도로 빽빽하거든요. 더구나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장강 이남은 개발의 손길조차 안닿은 오지 중의 생오지가 대부분이고, 이는 오나라 행정체계에 들어가지 않는 이민족+산월이 엄청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마지막으로 위나라의 미집계인구가 많은 이유는 크게 2가지입니다. 국경과 병호제. 먼저 국경이 어마어마하게 길어요. 서쪽의 량주부터, 하투를 거쳐서 병주 북부의 삭방, 오원일대와 기주, 유주 북부까지 수천 킬로미터의 사막 및 초원이 펼쳐진 위나라 국경에는 유목민족들이 엄청 많이 돌아다닙니다. 정주민족도 아니고 위나라 국민도 아니니 인구집계가 정확히 될리가 없죠. 형북일대 또한 한수 상류쪽으로는 온통 산과 이민족이 있었고, 예주 여남 밑은 넓고 험한 첨산 일대가, 여강~광릉까지는 장강을 맞대고 오나라와 마주보는 강으로 된 국경이 있죠. 지금처럼 선으로 된 국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감시통제시스템이 있을 때도 아니니 국경 일대에서 위나라 안팎을 오가는 모든 집단을 다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두번째로 병호제인데, 오나라의 세병제가 군주에게 일임받은 호족 사병집단체제라면, 위나라의 병호제는 세습되는 징집국가병역입니다. 유민과 도적들을 그러모아서 가호를 만들어주고 전국에서 고아와 과부들을 모아서 호구를 완성해주는 반은 국민 반은 군인의 형태라고 할까요? 이들은 정식 인구조사에 안잡히는 것이 큽니다. 병력이 되는 정남 숫자만 계산되고 나머지는 통계상에서 제외된다고 봐야죠.
황가네떡볶이 2020.02.06 02:32  
[@Kuat] 멋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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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at 2020.02.06 01:56  
2번째 위촉오 3색지도에서조차 오나라는 사실 과대평가된 것이, 형남4군이라고 거창하게 이름은 붙여놨지만 그나마 장사가 인구수가 되는 수준이라 장사>영릉+계양+무릉이고, 4개 군을 합쳐봐야 강릉이나 시상 1군데만 못한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오나라를 놓고봤을 때 장강과 바로 붙은 지역을 도시라고 해줄만한 수준이라 그나마 꼽자면 강릉-무창(강하)-시상-건업(+단양)-오군 정도가 인구와 식량이 제대로 모이는 곳이고 그마저도 강릉은 뻑하면 위나라하고 싸우느라 안정되지를 못하고 동정호 평원은 산월과 무릉만이랑 치고박느라 개발도 안되고..시상은 수군 요충지기는 해도 도시나 생산기지로서 손꼽기에는 매우 남쪽에 치우쳐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오나라에서 어지간한 지방관이 형주목이나 교주자사직을 맡고 중앙직으로 발돋움하는 경우보다 단양태수, 오군태수를 역임한 사람이 고위관직으로 올라가는게 더 정석이었고요. 이러니 1개주에 불과해도 한중-성도-파군에 걸쳐서 식량생산이 되고 중앙집권이 강한 촉한이 형주남부+양주+교주 3개주를 가졌으나 세병제로 중앙에 힘이 덜모이는 오나라의 절반 이상의 국력을 발휘했던 이유죠.
관계튼대왕 2020.02.06 19:34  
[@Kuat] 삼오일대도 동진 시기부터 본격적인 발전이 이뤄지기에 오나라 과대평가란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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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삐야 2020.02.06 16:35  
지식에 감탄하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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