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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4세와 그의 요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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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3131569.jpg 루이 14세와 그의 요강 이야기
 


루이 14세는 요강 위에 앉아 서슴없이 자기 친족들을 맞아 들였다. 이러한 행동은 충격적인 것이 아니었다. 합스부르크 가의 군주였던 막시밀리안 1세 (1459-1519) 역시 요강 위에서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고 업무를 처리했다. 


그 당시 식탁에서 ‘국왕에 관한 역겨운 이야기’, 즉 태양왕의 항문에 난 종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상류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왕의 종기를 제거하는 문제 역시 유럽 전역의 화제가 되었다. 또 왕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변비가 점점 더 심해지자 가까이 있던 사람을 불러들여 관장하는 일을 돕게 했다. 루이 14세 치하에서는 귀족들 스스로 배변 욕구를 처리하는 것을 권력에 대한 반항으로 간주했다. 


절대왕정 시대에는 왕의 근처에 머무는 특권을 얻기 위해 귀족들은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다. 솔선해서 왕의 배설물을 검사하는 사람도 있었고 왕의 엉덩이를 깨끗이 닦아주는 사람도 있었다. 요강을 관리하는 특권을 얻기 위해 귀족들은 당시 프랑스 주화로 10만 냥을 지불해야 했고, 그들이 적어도 2백년 전부터 귀족의 자손이었음을 증명하는 증거까지 제출해야 했다. 




루이 14세가 자신의 용변 처리를 궁정예식으로 정형화한 것은 당시로서도 새로운 일이었다. 15세기의 루이 11세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변기를 보지 못하도록 커튼으로 가려 놓았다. 왕은 다른 사람들이 악취를 맡지 못하도록 쑥국화를 사들였고 덕분에 그가 용변을 보고 난 뒤에는 커튼 뒤에서 쑥국화가 발견되곤 했다. 그러나 루이 14세에게는 그런 은밀함이 남의 이야기였다. 계급 사회의 정점에 서 있던 그에게 창피함이라는 것은 가당치 않은 문제였다. 더 나아가 그는 궁정 생활의 규칙을 새롭게 정했다. 즉 왕이 요강 위에 앉아 있거나 옷을 갈아입는 등 은밀한 상황에 있을 때 왕을 알현하거나 그를 돕는 것은 가장 영예로운 일이었다. 반면 영국인들에게는 이와 같은 프랑스인들의 궁정 의식이 놀랍고 불쾌하기만 하였다. 그런 낯 뜨거운 행동을 가리켜 영국인들은 ‘프랑스 식 예절’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아무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고 공개적으로 배설을 하는 것은 프랑스 궁정에서도 일반화된 현상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리제로테가 1716년 5월 5일에 쓴 편지를 보면, 루이 14세의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은 ‘변기’에 앉아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런 행동이 그 시대에도 완전하게 용인되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베르사유 궁전 전체를 통틀어 수세식 시설을 갖춘 화장실은 한 군데도 없었다. 대신 사람들은 요강을 이용했다. 베르사유에는 대략 3백 개 정도의 요강이 있었으며, 같은 뜻으로 쓰이는 단어도 그 숫자만큼 많았다. 


루이 15세의 애인 마담 퐁파두르는 요강을 만들어준 사람에게 장군이나 받을 법한 연금을 주었다. 요강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함께 앉을 수 있도록 특별히 주문 제작한 그 요강은 서로 등을 돌리고 볼일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베르사유 궁에서는 때로 코를 찌르는 듯한 냄새가 풍겼다고 한다. 국왕과의 접견이 몇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신분이 높은 여성들은 선 채로 몇 겹짜리 풍성한 스커트를 보호막 삼아 생리적 욕구를 해결했다. 신사들은 기둥, 벽감, 화려한 커튼, 태피스트리 뒤에서 소변을 보았다. 때문에 ‘환기’를 위해 끊임없이 궁의 내부 장식을 갈아야 했다. 




사실 베르사유 궁에는 17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상하수도망을 이용해 물을 공급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될 점이 없었다. 게다가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할 기술도 있었다. 16세기 말 영국의 귀족들은 이미 수세식 화장실을 널리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루이 14세는 ‘고대 도시의 공중 목욕탕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욕실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베르사유 궁에서는 왜 수세식 화장실을 반기지 않았을까? 그 결정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베르사유 궁의 상황이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에 수세식 화장실을 설치했더라면 화장실의 역사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만일 그랬다며 수세식 화장실은 귀족 사회에 널리 확산되었을 것이다.


루이 14세의 요강들 중 가장 세련된 것은 검은색 에나멜이 칠해진 바깥쪽에 일본의 자연 풍경이 그려져 있었고, 특히 황금색과 총천연색의 새들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요강 안쪽은 붉은색 에나멜로 칠이 되어 있었고 앉은 자리에는 폭신하게 속을 넣은 초록색 벨벳이 덮여 있었다. 



1874년 즈음 센 강은 온갖 오물로 더럽혀지고 강 전체가 전염병의 온상이 되어 여름철에는 수면 위에 거품이 생기기 까지 했다. 1885년 파리에 거주하던 사람은 50만명 정도였고 그들이 사용하던 수세식 화장실은 약 2만 6천 개였다. 대다수 파리 주민들은 1900년까지도 편리한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20세기 초까지도 파리는 악취가 심한 도시였다. 

- 화장실의 작은 역사 中

1 Comments
ABChu 2018.04.03 21:44  
파리는 지금도 악취 심해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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