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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황제가 되려고 했던 이필제

주성치 3 1887 4 0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조선에서는 ‘이필제의 난’이라 불리는 반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인 이필제는 기묘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름이 아니라 자신이 조선과 청나라와 일본 등 동양을 지배하는 황제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필제(李弼濟 1825~1871년)는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洪城)인 홍주(洪州)에서 태어난 향반(鄕班 시골 양반)이었습니다. 그의 증조부는 태안군수(泰安郡守)를 지냈던 이완(李烷)이었는데, 이는 이필제가 어느 정도나마 조정에 영향이 있었던 집안 출신임을 뜻합니다. 실제로 이필제는 군인을 뽑는 과거시험인 무과에 응시한 경험도 가졌으니, 나름대로 학문을 아는 지식인 계층이었던 셈입니다. 



horse_test_01.jpg 동양의 황제가 되려고 했던 이필제

(조선시대 무과시험을 보는 장면을 그린 그림. 하지만 조선 말기로 갈수록 과거 합격자는 늘어나는데 반해, 관직은 별로 늘어나지 않아 과거에 합격하고도 벼슬자리가 오지 않아서 실업자 신세로 지내는 선달
先達들이 많아졌습니다.)



하지만 이필제는 무과에 합격을 했으나, 끝내 벼슬자리를 얻지 못한 선달(先達)에 그쳤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실업자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요즘 같이 보고 즐길 오락거리가 많은 21세기에도 실업자들의 신세는 고달픈데, 하물며 19세기 조선에서 실업자들은 얼마나 자괴감에 빠져 괴로워했을까요? 집에서 빈둥거리며 노는 실업자로 계속 지내면서 이필제는 아마도 “나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고 썩히게 만드는 이 따위 세상을 뒤엎어 버려야 한다!”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하지 않았을지요.  


그러던 와중인 1850년 5월 이필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었던 지역인 풍기군(豊基郡)을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허관(許瓘)이라는 노인을 만났습니다. 훗날 이필제를 체포하여 심문한 내용을 기록한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에 따르면 허관은 이필제한테 “앞으로 조선을 침략해 올 서양 세력을 물리치고, 오랑캐 청나라에 맞서 싸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허관이 이필제한테 서양을 물리치라고 말한 것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작용했습니다. 이필제가 허관을 만나기 11년 전인 1839년에는 서양의 나라인 영국이 중국 청나라를 침공한 아편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헌데 전쟁의 결과는 불과 2만 명도 안 되는 영국군이 4억의 인구를 가진 세계 최강대국 청나라를 상대로 완전한 압승을 거두는 이변이었습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자 혹시 영국 등 서양의 나라들이 조선에도 쳐들어 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심과 적개심이 퍼졌습니다. 허관이 이필제더러 “서양에 맞서 싸우라.”는 가르침을 준 것도 그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1024px-Destroying_Chinese_war_junks,_by_E._Duncan_(1843).jpg 동양의 황제가 되려고 했던 이필제

(아편전쟁을 그린 그림.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가졌던 청나라는 불과 2만 명 내외의 영국군에게 철저하게 참패를 당하는 치욕을 맛보았습니다. 이 소식이 조선에 전해지면서 많은 조선의 지식인들은 영국 같은 서구 열강에 대한 공포심에 떨었습니다.)



아울러 허관의 가르침 속에는 서양 뿐만 아니라 중국 청나라도 조선의 적대 세력으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1637년 조선이 청나라에 굴복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북벌론(北伐論)이 조선의 민간에서 여전히 강하게 나돌았다는 증거입니다.


다만 이 허관(許瓘)이라는 노인을 이필제는 뒤에 가서는 ‘허최(許璀)’나 ‘허선(許璇)’으로 계속 다르게 불러서, 과연 실존 인물이었는지도 의심스럽습니다. 혹시 이필제가 허관이라는 신비한 가공인물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생각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허관을 만나 가르침을 얻었다는 1850년부터 이필제는 단순히 집에서 빈둥거리는 실업자인 선달이 아니라, 자신이 앞으로 나라를 뒤흔들어보겠다는 야심을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인 1866년 10월 26일, 프랑스 군대가 조선의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자 조선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수한 최신 무기로 무장한 프랑스 군대의 힘에 조선군은 너무나 형편없이 무너졌고, 강화도가 파죽지세로 프랑스 군대한테 점령당하자, 이 소식을 듣고 한양의 관리와 백성들이 겁에 질려 가족들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앞다투어 산속으로 피난을 떠나는 등 조선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비록 프랑스 군대는 2개월 후인 1866년 12월 17일에 떠났지만, 이 병인양요가 조선에 가한 충격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6년 전인 1860년, 중국 청나라의 수도인 북경이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에게 함락당한 것처럼 이제 조선도 서양 군대한테 공격을 받아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급속히 사회 전반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1024px-FranceGanghwa (1).jpg 동양의 황제가 되려고 했던 이필제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침공한 병인양요를 묘사한 그림. 이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한양에 살던 수많은 사람들은 산골짜기로 앞다투어 피난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라를 뒤엎으려는 야심을 품은 이필제한테는 병인양요가 오히려 좋은 기회로 작용했습니다. 프랑스 군대의 침공으로 조선 백성들 사이에 프랑스 등 서양에 대한 공포심과 적개심이 널리 퍼지자, 이를 이용하여 서양에 맞서자는 이필제 자신의 선동에 사람들이 손쉽게 넘어오리라는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필제는 심홍택(沈弘澤)과 심상학(沈相學), 김낙균(金洛均)과 양주동(梁柱東) 같이 평소에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런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본래 거지였던 주원장도 사람들을 모아서 명나라를 세우고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만약 나에게 1천 명의 강한 군사만 있다면, 우선 이 나라 조선부터 장악한 다음 곧장 중국으로 쳐들어가 한 달 안에 청나라를 손에 넣고서, 동쪽의 일본까지 공격하여 점령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자연히 천하는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고, 저 서양마저 몰아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심홍택 등은 처음에 이필제의 말이 다소 허무맹랑하다고 여겨서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필제가 계속 진지한 태도로 “우리라고 천하를 손에 넣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지금이야말로 서양의 침공으로 세상이 어지러운 판국이니, 이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우리가 나라를 바로잡고 천하를 쥘 수도 있다.”라고 열성적인 구호를 외치는 것을 보고는 마음이 움직여서 그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심했습니다. 



Hongwu1.jpg 동양의 황제가 되려고 했던 이필제

(본래 떠돌이 거지였다가 사람들을 모아 힘을 길러서 중국을 통일하고 황제가 된 주원장. 그의 이런 입지전적인 내력 때문에 홍경래와 이필제 같은 수많은 반란자들은 주원장을 모델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반란 계획이 새어나가 관아에 알려졌고, 곧바로 관아에서는 그들이 나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대역죄인이라고 판단하여 체포에 들어갔습니다. 이필제의 일행 대부분은 관아에 잡혀 들어갔으나(1869년 4월 21일), 이필제와 김낙균은 그들이 살고 있던 충청북도 진천(鎭川)에서 경상남도 진주(晋州)로 도망쳤습니다.

 

진주로 도망친 이필제 일당은 우선 관아의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손에 넣고서 사람들을 모아 반란군을 늘린 다음, 한양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군자금을 얻기 위해 인근 마을의 부자들을 습격하여 재물을 빼앗으려 했습니다(1870년 2월 24일). 하지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겁을 먹고 달아나는 바람에 이필제는 진주에서 반란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중도에 포기했습니다. 


나흘 후인 1870년 2월 28일, 이필제는 세 번째 반란 계획을 세우고 나무꾼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일단 진주의 군사가 주둔한 병영으로 쳐들어가 무기를 빼앗은 다음, 남해안의 섬들을 점령하고 거기서 식량을 모으고 군사들을 불린 다음, 한양으로 진격하여 궁궐을 점령하고 곧이어 청나라를 공격한다는 내용이 주요 골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도 도중에 새어나가 관아의 포졸들이 체포하려 몰려오는 바람에 이필제는 달아나야만 했습니다. 


그 후 이필제는 1871년 2월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崔時亨 1827~1898년)에게 접근하여 “나는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의 환생이오. 이제 내가 조선과 중국을 지배할 제왕이 될 것이오. 그러니 그대는 나를 도와 일단 이 나라를 장악하는 일부터 도와주시오. 그러면 내가 그대와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중국까지 쳐들어가 천하를 손에 넣을 것이오. 그대가 현명하다면 이 기회를 놓치지 마시오.”라고 허풍을 떨어서, 최시형으로부터 동학교도들을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동학교도가 포함된 180여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이필제는 1871년 3월 10일 경상북도 영해(寧海)의 관아를 공격하여 부사 이정(李政)을 죽이고 관아를 점령했습니다. 하지만 이틀 후인 3월 12일, 관아의 습격 소식을 듣고 수많은 관군들이 진압하기 위해 몰려오자, 이필제 일당은 겁을 먹고 대부분 달아나 버렸고 이필제도 충청북도 단양(丹陽)으로 도망쳐 숨었습니다.  


4개월 후인 1871년 7월 5일, 이필제는 다섯 번째 반란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번에는 경상북도 문경(聞慶)의 요새인 조령관(鳥嶺關)을 습격하여 무기를 빼앗고, 서원 철폐로 인해 조정에 불만을 품은 유생들을 모아 반란군을 조직하여 한양으로 진격해 궁궐을 장악한 다음, 곧바로 중국으로 쳐들어간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계획도 주막에 머물며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이필제 일당을 보고 “수상한 자들이 나타났는데, 아무래도 역모를 꾸미는 듯하다.”라고 여긴 마을 사람들이 관아에 신고를 하는 바람에 관아의 포졸들에 의해 체포당하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1871년 8월 2일). 그리고 체포된 이필제는 4개월 후인 1871년 12월 23일 반역죄인으로 분류되어 처형당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과 중국과 일본을 지배하고 동양의 황제가 되겠다던 이필제의 야심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제 2의 주원장을 꿈꾸었던 이필제였지만, 끈질기게 음모를 꾸미는 교활함에 비해 천하를 재패할 능력은 턱없이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출처: 실업이 바꾼 세계사 162~173쪽

3 Comments
만수르 2018.03.31 19:09  
피닉제 미만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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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느낌 2018.04.01 04:39  
가진건 부랄두쪽밖에없던 거지새끼 주원장이나
30넘어서까지 낮술처먹고 동네 건달짓하던 유방이 대륙황제가 되었다는건
정말 멋있는 스토리이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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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u 2018.04.02 12:02  
혹시나 기적적으로 이필제가 왕이 됐다면.. 우리나라는 강대국이 되었을지도?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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