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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 문명과 인류의 비밀 9-2

공승연 0 284 0 0


 


 


토라

 

 

여기서 우리는, 단지 이 외계인 시리즈뿐 아니라 세계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한 대목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들 알다시피 성서는 창세기로 시작해서 요한계시록으로 끝을 맺는 66권의 장대한 기록이다. 여러 저자들이 쓴 글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기독교 일각에서는 저자들에게 성령이 내렸으므로 신이 직접 썼다고 하고 ‘성서 무오류성’을 주장하기도 하나 예수의 행적을 다룬 4대 복음서 안에서만도 사실관계의 모순이 숱하게 등장) 크게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나누는데, 그 분기점은 바로 예수의 탄생이다.

 

사실 기독교 신학의 입장과 무관하게 냉정한 관점으로 본다면 구약과 신약은 전혀 다른 철학을 다루고 있는 두 개의 다른 책이다. 이 다른 철학의 구약 쪽 중심이 되는 것이 위 돌판의 내용, 즉 배타적 유일신앙과 종교 및 생활 규범의 제시 및 그에 따른 보상과 처벌을 논하는 ‘율법’이다(이것이 신약에 이르러서는 예수에 의해 사랑과 소망, 관용과 용서 등의 인간적인 관점으로 무게 중심이 바뀌게 되는 거다).

 

이 구약성서 중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첫 다섯 편인데, 이를 토라(Tora), 혹은 ‘모세오경’ 이라고 한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다름아니라 이 다섯 편의 저자가 바로 모세이기 때문이다(다른 신학자들에 의해 이후 편집, 첨삭되었다고도 함).

 

이 부분은 모세가 중요한 다섯 개의 경전을 썼다는 기술적 사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다섯 개의 경전 속에, 아니 실은 창세기와 출애굽기 두 편 안에 천지창조에서부터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소돔과 고모라, 노아의 방주, 아브라함, 카인과 아벨, 출애굽 등으로 대변되는 우주와 인간의 탄생과 원죄의 발생, 인간의 몰락, 십계명 등 유태교와 기독교, 나아가 이슬람교의 세계관의 뼈대를 이루는 주요 사건과 철학들이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태교와 기독교(신,구교, 성공회, 동방정교를 비롯한 모든 기독교계 종파 포함)그리고 역시 토라를 기본경전으로 삼는 이슬람교는 공히 모세라는 야심적 일개인에 의해 창시된 거나 다름 없는 것이다...

 

물론 모세의 원래 목적이 이렇듯 세계적 종교들을 창시해서 수천 년을 존속시킨다는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가 필요했던 것은 ‘반신반인’인 파라오와 이집트의 기존 신들을 대신할 새로운 유일신 야훼의신화, 그리고 그 대리인으로서 자신의 권위였다. 이를 통해 그는 아마 이집트의 비밀 문서들을 통해 접하고 꿈꿔왔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 했을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미래를 향한 비젼과 개인적인 권력욕이 적당히 섞인 형태로 말이다. 이런 그의 의도와 이집트 문명에 대한 외계인들의 환멸이 적절히 맞아 떨어진 거다.

 

그러나 그 실현 과정에서 다시 상황은 어긋나게 된다. 정신적으로 진보한 외계인들에게는, 아무리 통치와 질서를 위한 수단이라 한들 모세의 ‘질투하는 신 야훼’ 드립이나 율법과 상벌,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 등이 맘에 들었을 리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참다 못해 모세에의 협조를 거부하고 그만 떠나버리고 만다. 그날로부터 계속되는40년간의 방랑은 이를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 모세와 유대인들의 ‘약속의 땅’ 행이 큰 차질을 빚게 된 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먼저, 약속의 땅이 애당초 지금의 팔레스타인 일대 가나안 지역이 아니었을 가능성이다. 물론 ‘이집트의 강(나일강을 의미)에서 유프라테스강 사이’라는 약속의 땅의 구체적인 지역이 출애굽기에 등장하고 이 땅은 이미 창세기에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삭, 손자인 야곱에게도 약속되었던 바 있으나, 이 내용의 필자가 바로 모세 자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어디까지가 사실일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렇다고 보면 이 지역은 어쩌면 외계인들만이 데려다 줄 수 있는 매우 먼 어느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외계인들과의 공조가 끊어진 마당에 모세에게는 수십만에 달하는 유랑민 집단을 그 약속의 땅에 데려갈 수 있는 아무런 정보도 힘도 없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서, 걸어서 몇 달이면 충분할 거리를 40년 동안이나 헤매고 다닌 출애굽기의 미스터리가 풀린다. 그리고 막상 도착한 가나안에도 약속된 땅이 기다리던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과 열라 싸워서 점령해야 했다는 점이나, 그리고도 얼마 후에 결국 쫓겨나 수천 년이 지난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땅을 다시 차지하지 못했다는 점도 설명이 된다.

 

결론적으로, 그들이 도달한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태인들이 애초에 약속 받은 옥토가 아니었다. 그들은 어딘지 모를 그곳에 결국 가지 못했고, 척박하고 건조하며 이집트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누구보다도 힘들게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했을 뿐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곳은 토라의 저자 모세에 의해 사후에 짜맞춰지고 윤색된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모세가 이끄는 유태인들은 이 빨간 선을 따라

시나이 반도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다.

고작 남한 크기만한 이 지역을 통과하는데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린 이유는 원래의

약속의 땅’ 계획이 틀어지고 전혀 새로운

계획과 전략을 수립, 시행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모세는 바보가 아니었다. 외계인과의 공조가 흐트러지고 자신이 이끄는 수십만 난민에게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을 알았을 때, 그는 자신의 권위와 권력을 유지하고 향후에 유용하게 써먹기 위한 하나의 도구를 준비하게 된다. 이 도구를 만드는 원리는 이미 파라오의 궁정에서 습득했지만 필요한 것은 재료와 기술이었고, 그것은 외계인들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었다.

 

아마 그것은 두 번째 40일간의 회담을 통해 얻어냈을 것이다. 두 번째 돌판을 가지고 산을 내려왔을 때는 첫 번째의 경우와는 달리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서 마주보기가 두려웠다(출 34:29~30)는 기록이 남아 있다. 따라서 두 번째 돌판 자체, 혹은 그것과 함께 가지고 온 물건 중 당시의 인간으로서는 얻을 수 없는 모종의 강력한 에너지원이 포함되어 있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가져온 돌판에는 첫 번째 외에 추가적인 글들이 실려 있는데, 그 중 특기할 것은 이전과는 달리 ‘내가 네 앞에서 아모이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쫒아내리니’ (출 34:11) 에서 보듯 주변의 구체적인 지명이 갑자기 등장한다. 이것은 외계인들과의 약속이 어그러진 후 모세가 현실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일부러 채워 넣었을 것이다.

 

암튼 이렇게 다시 돌아온 모세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새겨진 야훼의 구체적 증표인 성스러운 돌판과 새로이 제작한 모종의 도구를 통해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유지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들이 부여한 것은 단지 정치적, 정신적 권위만이 아니었다. 이것이 가진 ‘물리적 힘’을 통해 모세는 이후 수십 년 간 절대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한 돌판에서 약속되었듯이 결국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많은 원주민 부족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세우게 되니 말이다.

 

그 도구는 바로 아래의 것이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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