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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명 vs 5000명 "직산전투"

주성치 0 852 2 0

IMG_4068.JPG 4000명 vs 5000명 "직산전투"


1597년 음력9월7일

직산 전투

 

음력 8월 중순경 다시 한 번 발발한 정유재란

왜 좌군과 우군은 각각 남원성과 황석산성에서

방어에 나선 조명연합군을 궤멸시키며

전라도의 점령에 나설 수 있었다

 

왜 좌군은 전라도의 점령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왜 우군은 점차 북상하여 한양을 점령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IMG_4069.JPG 4000명 vs 5000명 "직산전투"


음력 9월3일

왜 우군이 충청도까지 진격하자 다급해진 명군은 급히 경리 양호를 한양에 판견하였고,

한양에 도착한 양호는 제독 마귀에게 왜군의 북진을 막으라 명하였다

 

마귀는 휘하의 명군 부총병 해생에게 기마병 2천을 주어 선봉대로 급파하였고,

그 뒤를 다시 2천을 추가로 따르게 하였다

해생은 음력 9월7일 충청도 직산에 도착하였다

 

잠시 후 도착한 왜 우군 선발대는

구로다 나가마사의 명에 따라 해생의 2천 기마대에 기습 공격을 가하는 한편 원군을 요청하였다

 

왜군은 조총 일제사격으로 공격을 가했지만,

잠시 후 도착한 명군의 추가병력인 2천기병대가 합류하자 밀리기 시작하였다

왜군의 원군 역시 전투에 합류하였지만 전황은 뒤바뀌지 않고

명군은 왜군을 크게 압도하여 결국 왜군은 후퇴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객관적으로는 그리 큰 전투도 아니었고,

양군 모두에게 큰 피해도 아니었다

 

하지만 왜군은 잠시 부대를 재정비하기위해

왜 우군과 좌군의 모든 부대에 진군을 멈추게 하였다

이는 왜군의 보급과 병력 보충을 맡은 왜 수군의 진격을 기다리려는 목적 역시 있었다

 

직산에서의 전투는 전쟁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칠 만한 전투는 아니었다

조명연합군의 입장에선 잠시 왜군의 진격을 멈췄다는 것에 만족해야만 하는 전투였었고,

왜군의 입장에선 한양 점령을 위한 총공세를 준비하는, 숨을 고르기 위한 휴식 기간을 갖게한 전투였었다

 

14일 뒤의 어떤 해전이 있기 전까지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었고,

결과적으로는 직산전투는 결국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전투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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