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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장진호 전투'에 대해 알아보자

에그몽 1 250 2 0
최근 중국에서 흥행 초대박난 영화가 있다. 바로 <장진호>.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영화 <장진호>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 이후 개마고원까지 올라왔다가
 함경도 장진호 일대에서 중국군에 포위돼 1만80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한 '장진호 전투'를 철저히 중국의 시각에서 다룬 영화다.

당시 전투를 '항미원조(미국에 대항하기 위해 북한을 돕는다)'라고 부르고, 
한국전쟁을 '승전'으로 기억하는 중국이 올해 공산당 100주년을 맞아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만든 '국뽕영화'인 셈인데, 
제작 의도대로, 중국의 SNS에는 애국심이 차오른다, 눈물을 흘렸다 등의 호평 일색의 관람후기로 도배되었다.

이번 시간에는 장진호 전투 대한 중국인들의 자의적 해석과 활용은 뒤로하고
세계 3대 동계 전투라고 불리는 '장진호'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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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세역전과 미 해병 1사단의 도착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대한민국이 위기에 몰리자,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 
이후 미 10군단에 배속된 해병 1사단이 원산에 상륙했는데, 한반도 동부전선에 배치되는 병력이었다. 
한국군은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 해안으로, 미 해병 1사단은 원산, 함흥을 거쳐 장진호 방향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미 해병 1사단 주력부대는 장진호까지 진격했다. 
(수력발전을 위해 압록강의 지류인 장진강을 막아 조성한 인공호수인 장진호는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 완공됨)

이곳은 평균 해발 1500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악 지형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 깊은 오지에 사는 주민들에게 미군들은 신기한 존재였다. 
이곳의 주민들은 오랜 삶의 터전인 이곳이 곧 세계적인 격전장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2. 동서로 갈라진 미군

10월 19일 평양을 점령한 유엔군은 신의주 방면을 목표로 진격했다. 
 적은 보이지 않았고 전쟁은 곧 끝날 것 같았다. 맥아더는 고무됐다.

“ 전선에서 압록강으로 진격하라! 크리스마스 전에 미 8군은 철수한다."


미군은 서부전선과 동부전선으로 나뉘어 진격했다. 
당시 두 전선의 최대 간격은 약 120킬로미터였고, 그 사이에 높은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 
두 전선의 단절은 미군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이를 간파한 마오쩌둥은 미군을 산악 깊숙이 유인하여 포위 공격하는 전략을 세웠다. 
10월 19일에 압록강을 건넌 38만의 중국군은 빠르게 남하해서 전선에 투입,
경무장한 중국군은 빠르게 남하해서 참호를 깊게 판 다음 후퇴해 오는 미군을 기다렸다.


3. 군우리에서의 막대한 피해

뒤늦게 중국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을 알게 된 군우리의 미 2사단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매복한 중국군은 미군 선발대 전차는 그냥 보냈다. 특유의 유인 전술이었다.
중국군은 이미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있었기에 급할 것이 없었다.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중국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좁은 계곡에 갇힌 미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미군도 대응하여 사격을 가했지만 고지의 중국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찰스 랭글에게 이날은 인생 최악의 날로 가슴 깊이 남았다.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그때 무참히 패배했습니다. 많은 미군이 중국군에게
붙잡혔고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제 인생 최악의 날로 기억합니다. 1950년 11월 30일 이후
그날보다 더 최악이었던 날은 없습니다.
뭐가 그때보다 나쁠 수 있겠어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말입니다. 제가 살아남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찰스 랭글(당시 미 2사단)

군우리 전투는 3천여 사상자를 남겼고 
맥아더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렸다.
“모든 전선에서 철수하라!”


4. 동부전선 문제없.. 있다!! 도움!!!

미 8군의 서부전선이 밀릴 무렵, 동부전선에는 미 10군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 해병 1사단이 전개하고 있던 장진호는 압록강으로 진격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미군이 향하고 있던 유담리는 해발 1060미터의 고지대로, 함흥까지 직선거리로 약 100킬로미터였다.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미군은 장진호 동쪽과 서쪽으로 진격했다. 그들 앞에는 15만의 중국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밤을 틈타 중국군은 철저히 숨어, 빠르게 이동했다. 미군은 이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압록강변에서 장진호까지, 중국군은 산악지형을 도보로 이동했다. 
미군은 수시로 정찰기를 띄웠으나 중국군의 엄폐가 뛰어났기에 발견할 수 없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밤, 공격 신호가 울렸다.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보이지 않는 적과의 전투였기에 미군은 중국군의 기습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장진강 동쪽의 미 7사단이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퇴로는 막혀 있었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지만 
7사단은 얼어붙은 장진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공격은 집요했다. 일부 병력이 무사히 장진호를 건넜으나 
미 7사단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5. 추위와의 싸움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주둔하던 미 해병 1사단도 철수를 결정했으나, 그들은 덕동고개를 넘어야 했다.
덕동고개는 미 해병 1사단 5연대 F중대 237명이 선점하고 있었다. 
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중국군이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군단에서 ‘우리가 얼마나 죽든 상관없다, 무조건 여기를 돌파해라’ 하고 명령했지요. 굉장했습니다.”
- 김윤익(당시 중국군)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중국군은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들 쪽으로 기관총을 쏘고 박격포와 대포로
공격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달려오는 겁니다. 끊임없이요.”
- 조제프 오언(당시 미 해병 1사단)

전투는 5일간 이어졌고 F중대는 기어코 덕동고개를 사수해 사단의 퇴로를 확보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 237명 중에 86명만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중국군은 2천 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군과 중국군이 함께 감당해야 할 적이 있었다. 바로 혹한이었다. 양측에서 동사자가 속출했다. 
중국군 80사단 240연대 5중대는 전 중대원이 얼어 죽었다.

영하 30도를 밑도는 혹한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포로가 된 중국군들도 있었다. 
그들의 상태는 심각했다. 거의가 동상에 걸려 있었다.

“그들은 고무로 된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발이 꽁꽁 얼었습니다. 
마치 발을 얼음 통에 담근 것 같았습니다. 10파운드는 나가는 얼음덩이 말입니다.” 
- 월터 벤튼(당시 미 3사단)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12월 초, 미 10군단 병력이 하갈우리로 집결했다. 장진호 옆 유담리에서 남쪽으로 20여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이었다.
미 해병 1사단과 미 육군 7사단 병력이 중국군의 포위를 뚫었지만, 대다수가 전투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중국군 못지않게 무서운 적, 강추위 역시 이들을 괴롭혔다. 동사자가 속출했다. 수많은 비전투 손실.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전쟁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장진호 전투는 세계 3대 동계전투로 꼽힌다. 
장진호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조제프 오언은 자신의 중대에서 10퍼센트만 살아남았다고 말한다.

“우리 중대에 해병이 300명 있었습니다.
마지막 전투를 하고 마지막 노래를 부른 후 살아남은 장교는
저뿐이었죠. 저희 중대에는 고작 30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 조제프 오언(당시 미 해병 1사단)

그러나 혹독한 추위와 보급품 부족에 시달리면서 중국군의 전투 의지도 급속히 약화되었다.
당장 내일 어찌 될지 알 수 없는데 전투 의지를 어떻게 불사를 수 있었겠는가.

“양식이 없고 감자밖에 없는데… 감자 먹고 어떻게 삽니까. 얼어 죽은 사람도 많았습니다.”
- 김윤익(당시 중국군)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6. 가자, 흥남으로

하갈우리에 집결한 미군은 시신과 부상병을 항공기로 수송한 뒤 철수 작전을 전개했으나 쉽지 않았다.
중국군이 교량을 파괴했기 때문에 발이 묶인 채, 22시간이나 공격을 견뎌야 했다.

중국군의 공격이 뜸해질 무렵 미군이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예상외로 중국군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이 모두 동사했기 때문이다.

“아침에 점호하면 나오는 사람이 몇 없었습니다. 부대가 다 어디 갔는지 검사하면 거의 다 엎드린 채로
얼어 죽어 있었습니다. 장진호에서 그때 죽은 사람은 거의 추워서 죽거나 먹지 못해 죽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 김윤익(당시 중국군)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공군의 지원 덕분에 미군은 철수 작전을 재개할 수 있었고,
그들은 황초령을 넘어 함흥, 그리고 흥남으로 향했다.

image.png 중국에서 국뽕몰이중인 소재, \
수습된 전사자들은 흥남의 언덕에 묻혔다. 임시묘지는 낯선 땅에서 벌어진 미·중 충돌의 상징이 되었다. 


마무리.

모두가 아시겠지만 이후 전쟁은 길어져 1953년이 되어서야 휴전협정을 맺게 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통일의 기회를 날려버리게 된 셈이죠.

아무튼 중국은 '장진호 전투' 에 집중하며
인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실제 참전한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자면 열악한 보급과 강추위로 인해 전투의지를 상실하고 항복하기도 했는데, 
그런 부분은 모두 감춘 채 말이죠.
('꼿꼿하게 얼어죽은 모습'을 가지고 '얼음조각 부대'라고 칭송한다네요...)

+ 장진호 열풍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인사를 감금한

그들의 국뽕...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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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그림 출처 : 도서 <1950 미중전쟁>
이 글의 출처가 된 도서 <1950미중전쟁>은 KBS 다큐멘터리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영상이든, 책이든 보시면 한국전쟁이 왜 '미중전쟁'으로 확장된 개념으로 불리는지,
파악하실 수 있을겁니다! 

1 Comments
NationalTaxServ… 2021.10.27 16:41  
절대 잊으면 안된다.
중공(중국)공산당은 우리의 주적이다.
당연히 빨갱이 정으니도 우리의 주적이지

럭키포인트 18,517 개이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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