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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에그몽 5 2444 9 0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2.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한국사에 여러 왕이 유명한 편인데


신라의 진흥왕은 교과서적인 면에서는 사람들에게도 널리 알려졌지만


막상 세인들이 말하는 화잿거리에서는 자주 언급되진 않는 편이다.







조명을 좀 못 받는다고도 할 수 있는데,


사실 진흥왕 시기 신라의 확장이나 신라군의 전적은 대단한 수준이다.










1.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진흥왕 즉위 시점




2.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진흥왕 절정기



3.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단순히 영토부분만 보더라도 진흥왕 단 1대에 기존 영토의 3~4배에 가까운 수준으로 확장했다.


심지어 이렇게 확장한 곳이 무주공산 같은 지역이 아니라, 충분히 생산성 있는 지역들.






3.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특히 진흥왕 대의 북방 한계선은 당대의 여건을 생각하면 황당한 수준인데



현재까지 밝혀진 최북단인 마운령비가 있는 곳은 고구려 수도 평양성보다 훨씬 위쪽이고



심지어 국내성과 비교해도 위도가 별 차이가 나질 않는다.



이 곳은 훗날 발해가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의 신라의 북방 한계선보다 훨씬 북쪽이고


발해의 실질적인 최남단 실효지배 지역으로 여겨지는 함흥보다도 북쪽이다.



쉽게 말해서 신라가 개마고원 부근까지 다다른 것이다.




심지어 고려 시대에 접어들어서도, 공민왕 말기 이전에는 고려가 이 지역을 실효지배한 시기는 극히 짦았다.






그런데 순수비巡狩碑, 즉 왕이 순수巡狩 했다는것은 


일개 병사 시켜서 비석 박아놓은게 아니라 왕이 직접 여기까지 행차해서 백성들을 위문하고 다독인 후


그 성과를 기록해서 박아놓았다는 것이니,






순수비가 박혀 있다는것은 (오래 유지는 못했더라도) 최소한 당대에는 왕이 직접 행차해서 주민들을 위문할 수 있을 정도로


타국의 위협으로 인한 치안 등의 문제가 없는 확고한 신라의 영역이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사실 진흥왕 대의 신라 북방 한계선이 그보다 더 북쪽일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다.


마운령비가 세상에 알려진게 1929년, 즉 100년도 안된것이니 만큼


그보다 좀 더 북쪽에 순수비 정도는 아니더라도 조사하면 신라의 흔적이 나올 가능성이 없는것도 아니다.









1.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2.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마운령비





사실 기존에 알려져 있던 황초령비 조차도 당대의 여견을 고려하면 너무나도 북쪽이라


일제시대 학자들은


"신라 따위가 어떻게 여기까지 가냐... 믿을 수 없다." 는 논리로




황초령비 위작설, 


혹은 훗날 윤관이 여진족 땅을 정벌하러 갈때 프로파간다를 위해 


훨씬 남쪽에 있던 황초령비를 여기까지 끌고 와서 박아서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는


윤관 주작범설 등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보다 더 북쪽에


황초령비와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당대에 박은것으로 보이는 마운령비가 나옴에 따라


주작이 아니라 신라 북방 한계선이 더 길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황초령-마운령비의 내용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또 하늘의 은혜를 입어 운수를 열어 보여주며, 

명명한 가운데 신지(神紙)에 감응되어 부명(符命)에 응(應)하고 셈대에 적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방으로 영토를 개척하여 널리 백성과 토지를 획득하니, 

이웃 나라가 신의를 맹세하고 화사(和使)가 서로 통하여 오도다. 






여기서 이웃나라가 축하해주었다는 부분이 보이는데,


저 당시 '이웃' 중에 백제는 성왕 사망 이후로 치열하게 대립하며 가야 지역등에서도 싸우는 상황이었고


가야와 왜도 백제의 편에 있었다. 때문에 백제-왜-가야는 축하하는 이웃나라에 해당할 수가 없다.





그러면 남는게 고구려 뿐인데,


즉 고구려는 자기네들 땅을 가져간 신라에게 오히려 굽실거리며 축하해줬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삼국유사 등에서 진흥왕 대의 신라가 고구려와 뭔가 연결되어 있다는 늬앙스가 풍기는 기록도 있긴 해서,


꼭 저기서만의 뜬금없는 소리는 아닌것.





즉 진흥왕 시기의 신라는 고구려조차도 분쟁을 피하려 

땅을 내주고도 암묵적으로 인정하며 최대한 싸움은 사리는 상대였다는 것.



물론 이후 온달 이야기 등에서 보듯 신라에게 땅을 내준걸 굴욕적으로 느끼며 언젠가 수복해야지 하는 심리는 있었을거라고 보인다.













그러면 대체 진흥왕 시기 신라군이 얼마나 쎄길래 그 정도였을까?


일단 그전부터 봐야 하는데, 


신라는 진흥왕 즉위 이전 지증왕-법흥왕 무렵에 50여년간 전란에 시달리지 않고 힘을 비축한 나라였다.








그전까지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치열하게 침공하긴 했으나 


번번히 격퇴 되며 도저히 두 나라를 동시에 상대 할 수 없게되자



어느시점부터 타켓을 일단 서로 왕을 죽이며 원한이 깊은 백제로 좁히고 백제와의 싸움에 전념했다.



고구려의 침입이 뚝 끊긴 시점부터 지증왕 - 법흥왕은 50여년간 강도높은 개혁과 내정을 하며


신라의 힘은 크게 신장되고, 이후 진흥왕이 즉위한다.








3.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이사부






그런데 즉위했을 무렵 진흥왕은 굉장히 어린 나이였기에 바로 정치를 할수는 없었고


국정은 태후와 더불어 군부 최고직인 병부령의 이사부가 국정 운영을 담당하게 된다.



이때의 이사부는 우산국(울릉도) 정벌, 금관가야 정벌 및 고구려와의 국경 최전방 부근 안정화 등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실제로 진흥왕 대의 창녕 척경비에서 


과인(寡人)은 어려서 왕위에 올라 정사(政事)를 보필(輔弼)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라는 문구가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이사부인것.





"이사부" 는 사람들에게 그냥 장군 1명으로 기억으로 되긴 하나, 이런 상황을 보면


최소 10여년 이상 당대 신라의 국정운영까지 담당했던 엄청난 실력자였다.





어느정도냐면 이사부의 명성이 워낙 대단해서 권력이 집중될까 우려되어,


원래 1명이던 병부령을 2명으로 늘렸을 정도.



그렇게 병부령이 2명이 되고도


이사부는 여전히 국정운영에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는 존재였기에 위치 자체는 공고했다.






어린왕이 즉위했는데도 국정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니 그것도 당대 신라의 복이었다.







6.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548년, 


당시 백제 성왕이 거의 집어삼키기 직전이던 가야 '안라국' 에서 


이대로면 안되겠다고 느껴 고구려를 회유하여


6천명의 고구려군이 백제의 "독산성" 즉 현재 경기도 오산 부근을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백제 성왕은 급하게 신라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때 신라 장수 주령朱領이 3천명을 이끌고 밤낮으로 행군하는 강행군 끝에 늦기전에 도착하고


먼길을 달려오고 나서 바로 6천 고구려군과 일전을 펼쳐서 고구려군을 대패시켰다






1.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2.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고구려쪽의 자료를 인용한 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가 그냥 물러났다는 수준으로 나오지만,



백제나 신라쪽의 자료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크게 이겼다" "죽이거나 사로잡은 상대가 많았다" 등등으로 언급하고 있다.










1.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이런 승리에 자극 받아서인지 백제 성왕은 550년엔 자기가 먼저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이내 고구려의 반격에 "금현성" 을 내주고


"도살성" 까지 빼앗기기 직전이었다.










3.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그런데 이때 이사부가 이끄는 신라군이 등장한다.


이사부군은 백제가 버거워하던 고구려군을 박살을 내버리고 쫒아버려 금현성을 탈취하는 한편



백제-고구려가 모두 지친틈에 도살성까지 장악한다.




두 나라가 닭 쫒던 개만 된 셈이다.






2.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이때 신라군의 승리기념으로 세운 "단양신라적성비"



참전장수 목록에서 이사부가 가장 첫머리에 나와 최고사령관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551년, 드디어 나이가 찬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



새로 즉위한 진흥왕은 아무래도 이사부의 이름값이 부담 되었는지, 


이후의 전쟁에선 이사부는 기용을 하질 않고 





"김무력" 등을 새롭게 중용했는데, 김무력은 멸망한 금관가야의 후손인 인물이라


신라 내부에 입지가 약해서 큰 공을 세워 왕에게 신임을 받는게 중요한 인물이었다.


즉 일부러 신라 내부에 별다른 입지가 없어 자기에게 충성할 


싹싹한 젊은 장군을 밀어주는 코드인사를 감행했던것.






이사부는 이렇게 뒷방 늙은이가 되긴 하나 훗날 다시 재기용 되기도 하는걸 보면


그래도 따로 해꼬지를 입진 않은것 같다.










9.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김무력이 주축이 된 신라군은 551년부터 백제와 같이 고구려 남부를 그야말로 초토화를 시킨다.



당시 돌궐의 침입으로 1만 부대가 북방으로 이동한 고구려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된다.





당시 고구려는 다른때의 이름값에 비해 여러 대외전쟁에서 극히 약해진 상태라


백제, 신라의 공격에 속수무책 수준이었고



(심지어 백제가 나중에 관산성 전투에서 왕까지 죽고 대패해서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직후를 틈타 쳐들어왔을때조차도


백제에게 어이없이 패배할 정도로 막장이었던 상태)




북방에선 돌궐의 침입에 


내부에선 왕이 즉위할 무렵 수도에서 무려 수천명이 죽어나간 정치적 혼란까지 사상 최악의 위기 상태나 다름없었다.






5.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제 성왕이 


"지금 같이 고구려를 아예 끝장내버리자" 는 식의 제안을 했는데


진흥왕이 콕 찝어서 "내가 고구려 멸망까지는 굳이 바라진 않는다." 며 




오히려 고구려와 손을 잡는듯한 언급이 보인다.


위에서 말한 고구려가 신라와 뭔가 화친한듯한 늬앙스가 보이는 기록이란 바로 이것.




삼국유사 자체가 설화적이라 애매한 기록이긴 하다만 


여하간에 저 당시 고구려가 신라왕의 의지에 따라서 멸망 하고 안하고 까지 언급될 정도로 힘겨운 상태였다는것이다.










6.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이후 논란의 한강유역 장악이 나오는데



"신라가 뒤통수를 쳐서 동맹을 배신했다" 는 것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긴 하나,


실제로 관련 1차 사료를 보면 전투에 관해선 아예 언급도 없고


전투에 대한 이야기가 없으니 배신이나 통수, 기습에 관한 이야기도 당연히 없고


군사를 편제하거나 훈련 시키는 등의 전투를 암시하는 내용조차도 없다.




심지어 백제 쪽의 입장에 좀 더 들어간 일본서기에서는 

"그냥 백제가 버렸는데 신라가 들어갔다" 로 언급하고 있다.





여하간에 해당 사건이 있고 고작 3개월 뒤에 백제 성왕이 자기 딸을 진흥왕에게 시집 보내면서


양국의 관계 자체는 딱히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5.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6.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딸을 시집보낸 성왕의 위도가 어찌되었건 실제로는 성왕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고


곧 그 유명한 관산성 전투가 발생한다.


백제는 동맹인 왜, 그리고 이때 성왕의 정치적 술수로 거의 장악했던 가야까지 동원해서



백제-왜-가야 3개 세력 연합군으로 신라를 쳤다





당시 신라 김무력이 이끄는 주력은 고구려와의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갑작스런 백제군의 공격에 신라군은 크게 밀렸으나




이윽고 북쪽에 있던 김무력의 군단이 남하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고구려와의 국경을 내버려두고 남하한것에 대해 고구려와 밀약설을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예상치 못했던 군대가 갑자기 나타난 탓인지 백제 성왕은 어이없이 사로잡혔고


이후 목이 잘리면서 3개 세력 연합군은 처참하게 패퇴하게 된다.








1.png (장문) 고구려는 삼국통일을 \



이 직후 겨울에 고구려가 관산성 전투의 떡고물을 얻어먹으려고 넝마가 된 백제를 쳤는데


왕 목잘리고 저 지경이 된 백제에게도 지는 처참한 상황이 나옴.



이 지경이니 멸망 운운한게 꼭 과장까진 아닌셈이고



이때 백제 또한 패전한 이후에도 고구려군을 박살낼 정도로 그렇게 약한 군대는 아니었으나


신라와의 전투에선 지고 말았다.









그리고 보통 일반적으로는 '관산성 전투' 정도만 이야기 되지만,


이후 바로 다시 큰 싸움이 생기는데, 바로 "가야멸망전" 이었다.






5.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에게 큰 타격을 준 뒤 


진흥왕은 이제 가야를 아예 한꺼번에 멸망시키기 위한 작전에 착수한다.




가야 여러지역에 군사를 파견하고, 백제와의 연결로를 끊고, 


가야 소국들을 하나하나씩 신라의 판도에 집어넣었다.





한편 백제 위덕왕 입장에서도, 가야 지역은 아직 병합은 못 시켰지만


아버지 성왕때에 온갖 고생해서 정치적으로 거의 복속시킨 곳이라 쉽게 내줄수가 없었다.




하나하나씩 가야 소국들이 뜯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가야의 핵심인 반파국, 즉 "대가야" 만은 어떻게든 지키려는게 백제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백제군과 더불어 복속되어 있는 가야 병력,


더불어서 왜의 지원군까지 다시 끌어들여서





백제 - 왜 - 가야 연합군을 다시 한번 구성하게 된다.






9.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백제편에 참전한 왜군.





1.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일본 조정은 출정 직전 


"서쪽 오랑캐 신라는 작고 보잘것 없는 나라인데 어찌 하늘에 거스리고 예의가 없이 건방을 떠느냐


신라왕 목 진작을 벨것을 우리가 온전히 두어서 번영한것인데 왜 깝치느냐" 는 발언과 함께 군대를 파견한다.






관산성 전투에 가려졌지만 실상을 보면 이 싸움도 굉장히 중요한 싸움이었던것.



워낙에 중요한 일이다보니, 진흥왕은 여기서 고집을 좀 꺾고


봉인해둔 신라의 비밀병기를 꺼낸다.









3.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562년, 신라는 2만 군사를 동원했는데 총대장은 다름 아닌 전설 이사부 였다.


12년만에 복귀전이었는데, 


이사부가 활동한 연대를 보면 이 당시 나이는 못해도 70살은 되었을 무렵이었다.




재밌는건 이때 이사부의 부장으로 종군한 '사다함' 은 고작 15~16세의 나이라서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한 50살 이상은 났을 정도라는것.







신라 vs 백제-가야-왜 군의 싸움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의 기록이 자세한 편인데,


이채로운건 일본서기 내에서도 이 싸움은 그야말로 처참한 대패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1.PNG (장문) 그 찐따같던 신라가 맞냐? 진짜 진흥왕은 전설이다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일본서기의 묘사를 보자면, 처음에 "니에河邊臣瓊缶" 라는 장군이 상당한 용맹으로 신라군을 제법 밀어붙혔다고 한다.


그러나 니에는 용맹하긴 해도 병법에는 밝지가 못했다고 하는데,


신라군이 항복하는 척을 하며 무기를 버리고 백기를 들자 그걸 받아 들고 신라군에 다가갔다가



신라군이 "니에가 항복하려고 한다!" 며 소리치면서 역공을 퍼붓자


니에는 바로 사로잡히고 군대 역시 속수무책으로 박살났다고 한다.





여담으로 삼국사기의 사다함에 관한 기록을 보면


사다함이 5천 병력을 별동대로 이끌고 성문을 넘어가 백기를 세우자


성안 사람들이 당황하여 대처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어떤 연관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결국 백제+왜+가야 연합군은 처참하게 대패하고, 확실하게 죽은 사람만 최소 1,000명 이상이고


핵심 장수들은 1명을 뺴고 모조리 신라에 사로잡히는 처참한 대패를 당한다.






왜군 장수 중에는 야마토노 쿠니노미야츠코 테히코(倭國造 手彥)만이 탈출했는데,


테히코는 신라군의 역공이 시작되자 그 즉시 말을 타고 튀었고


신라 장군은 그런 테히코를 끝까지 추격했으나



마침 테히코의 말이 상당히 좋은 말이라, 성의 해자 부근에 이르러 넒은 해자를 단박에 뛰어넘어서


겨우 도주에 성공한다.





신라 장군은 테히코를 놓친게 분하여 


"쿠이스니지리(久須尼自利)! 쿠이스니지리!" 하고 외쳤다는데 


일본서기에서도 "신라말이라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고 기록하고 있고


지금에 와서도 이게 무슨 말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렇게 패전 하고 난 뒤의 상황에서도 <일본서기> 에서는 다소 신기할 정도로 쓸데없이 자세하게 기록했는데,






사로잡은 왜장 니에에 대해 신라군의 장군 중 한명은 "네 목숨하고 네 마누라 중에 누가 더 귀한지 선택해보라" 고 했고



이에 니에가


"목숨보다 귀한게 어딨습니까, 마누라보다 제 목숨이 더 귀합니다. 제 마누라는 첩으로 데려가시고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하고 제발 살려만 달라고 필사적으로 신라장군에게 목숨을 구걸했고



이에 신라 장수는 소원대로 니에는 풀어주고 니에의 부인은 겁탈한다음 풀어줬다.




니에는 멋쩍어하며 어쩔 수 없었다며 변명하며 부인에게 말을 걸려고 했으나 


부인은 당연히 "날 팔아먹어놓고 무슨 낮짝으로 말을 거느냐" 며 대화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아키나" 라는 왜장은 신라 장수가 강제로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를 일본쪽으로 향하게 하고는


"일본 대장은 엉덩이나 쳐먹어라" 라고 소리치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아키나는 필사적으로 버티며 "신라 왕은 엉덩이나 쳐먹어라" 라고 반항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치되는 단어가 '신라왕' 인것을 보면 "대장" 은 다소 뜬금없는지라


실제로는 "일본 천황은 똥이나 쳐먹어라" 했을 가능성이 더 커보이지만,


일본서기에서는 덴노에 대해 이런 원색적인 표현을 쓰긴 어려워서 바꾼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하간에 이때 패전이 워낙에 충격적이었는지 일본서기에서는 희한할 정도로


이때 패전 이후 온갖 굴욕에 대한 기록을 꽤 자세하게 써놓은 편이다.







2.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여하간에 이 승리로 신라는 관산성 전투 이후 불과 8년만에




고령, 거창, 합천, 함안, 의령, 진주, 창녕, 산청, 함양, 고성, 사천, 밀양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한꺼번에 병합하게 된다. 


이 지역은 이전부터 가야의 세력이 있어 개발이 상당히 되고 인프라가 풍족한 지역으로


무주공산 같은 지대도 아니었으니 만큼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이 승리로 진흥왕대 신라는 당대에 인접한 사실상 모든 세력을 다 최소 한번 이상 물리친것이 된다.




백제는 성왕-위덕왕 2대 동안 신라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으며,


가야는 아예 신라에 합병되었고,


왜는 처참한 패전 이후의 굴욕에 대해 온갖 구구절절 남길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고


고구려 역시 신라의 북방 확장에 한동안 최대한 사리면서 눈치를 보는 상황이 되었다.











1.PNG (장문) 이야기 신라사 - 200년이 넘을 동안 암군이 없었던 나라가 있다?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1.PNG (장문) 이야기 신라사 - 200년이 넘을 동안 암군이 없었던 나라가 있다?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진흥왕 직후 진지왕 시절에 다소 뜬금없는 기록으로


신라가 '백제에게 알야산성을 줬다' 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기록이 있다.


문제는 알야산성이 현재 전북 익산으로 비정되는곳이라는 점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진지왕 시기 신라는 백제 수도 사비성에서 지척인 이곳까지 진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성을 그냥 줬다는건 생뚱맞은 소리인데, 기록이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아마도 이 근처까지 진군했으나, 더 이상 나아가기 쉽지 않았고


이때문에 점령한 성에서 철수하며 '백제에게 줬다' 고 한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 직후 백제 위덕왕은 무언가 크게 충격이라도 받았는지, 


신라와의 국경지대 축성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도 진흥왕 시절부터의 기세를 몰아 백제를 거의 멸망시키려는 의도의 대공세를 취했으나,


알야산성 근처에서 사실상의 한계, 공세종말점을 느끼고 물러났을 가능성이 약간은 있다. 








2.PN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진흥왕 시기에 대해 주목할 점은 영토 확장도 있지만,


그 이상으로 눈에 띄는건 단기간에 이토록 넒은 영토를 확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내치' 에 있어서는 신라가 크게 부작용을 겪진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너무 멀었던 북방 영토를 고구려에 훗날 다시 내준 점이나,


이후 넒어진 영토를 고구려나 백제가 파상공세를 가하며 방어가 힘들어진 측면은 있으나,





이런 외부의 공세를 제외하면 "피지배민의 반발" 이라는 측면에선 의외로 신라는 부작용을 별로 겪진 않았다.




반란이 있더라도 오히려 내부 진골귀족들의 반란이 있었지, 


먹었던 지방의 피지배민이 반발이 극심하여 토해내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백제가 내부 세력의 반발에 쭉 시달리거나 


영향력이 있는 지역도 '내지화' 시키는데 굉장히 시간이 걸린것과는 좀 차이가 있는 부분.







멸망시킨 금관국 왕의 아들인 "김무력" 을 최측근으로 쓰면서 외부 세력을 키워주고,


"진흥왕 순수비" 에서도 알 수 있듯, 넒은 영토를 왕이 몸소 수시로 돌아다니면서


현지 세력을 위문하고 점령지의 조세를 면제하고 죄수를 풀어주는등




진흥왕은 정복 뿐만 아니라 이런 내정에서도 굉장히 감각이 있었다.




위에 언급한, 저 멀리 개마고원 근처까지 진흥왕이 직접 가서 세운 "마운령비" 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에 무자년(戊子年) 가을 8월에 관경(管境)을 순수(巡狩)하여 민심을 살펴서 위로하고 물건을 내려주고자 한다. 만약 충성과 신의와 정성이 있거나, 재주가 뛰어나고 재난의 기미(機微)를 살피고, 적에게 용감하고 싸움에 강하며,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공이 있는 무리에게는 벼슬과 ○(상품)을 상(賞)으로 더하여 주고 공훈(功勳)을 표창하고자 한다." 





나라에 충성하고 공을 세우면 충분히 포상을 해줄 것이고, 재주가 있는 사람에게도 충분히 포상을 해줄것이라는것.


저 멀리 개마고원 근처까지 가서도 저런 언급을 지역민들에게 할 정도였으니,


비교적 가까운 지역에 대해서는 어땠을지는 말할것도 없다.







실제로 "단양 신라 적성비" 에는 이사부 등 당시 출전한 신라 장수 말고도


야이차(也爾次)라는 현지인이 언급되는데, 이 사람은 신라를 위해 공을 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단양 신라 적성비에서는 야이차의 공을 기리고 그 가족들을 포상했다는 내용들이 적혀 있다.


진흥왕대 신라는 이런 일개 외지인 하나하나의 공을 비석으로 기념해서 현지에 설치할 정도로, 크게 중요시했다.



신라의 골품제에 비해서 의외로 삼국시대 전쟁 할적에는 지방민들에게 대우가 (당시 기준에서) 나쁘지 않았다는것.


실제로 삼국시대 후반부를 보면 신라의 지방민들이 굉장히 열심히 싸우고


그 가족들이 서라벌로 옮겨가며 포상을 받는 내용등이 꽤 자주 나오기도 한다.







또 진흥왕의 이런 모습이 크게 영향을 준게 한강유역에 대한 사민정책이다. 



한강 유역을 차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현재의 충북 충주를 소경(小京), 즉 '작은 수도' 로 까지 천명하고


이 지역에 수도의 사람들을 이주 시키는 강도 높은 사민을 진행했다.





사민이라는게 많은 불평 불만을 야기하는 일이고, 


당시는 이 지역을 차지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상황이었던것을 고려하면 정말 과감한 정치적 결정이었는데,



이렇게 진흥왕 때에 한강유역을 '내지화' 하는 작업을 철저하게 수행한 결과





훗날 무왕-의자왕 시기 백제의 파상공세에 털리며 서라벌 코앞인 경상남도까지 박살나는 와중에도


오히려 저 멀리에 있는 한강유역 쪽은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고 지키는 희한한 상황이 나타나게 된다.





한강 유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지 단숨에 파악한 원대한 정치적 식견이었고



이 한강유역을 통한 외교 덕에 신라가 멸망 직전에서 오히려 반전 했음을 생각하면 



진흥왕이 남겨준 안배로 인해 훗날의 후손들이 위기에서 살아남았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6.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다만 진흥왕대 확장은 "국정 운영의 난이도" 가 너무 높아지는 문제가 없진 않았다.



신라는 고구려-백제 양국으로 전선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다보니 


병력의 분산이 심해졌고




반면에 백제는 영토가 줄어든 대신 서로 왕을 죽이며 늘 껄끄럽던 상대인 고구려와 영토가 닿지 않아


모든 주력을 신라를 향해 투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삼국시대 말기 신라가 굉장히 위기에 빠진것 때문에, 이미지만 보면 당시 신라가 "아주 작고 조그마한 나라" 이미지인데


막상 신라가 보유하고 있는 단순 영토 지도만 보면 


엄청난 위기로 불렸던 삼국시대 최후반까지도 왜 그렇게까지 백제에 그렇게 밀릴 이유가 있나 싶을 수 있지만


이런점을 보면 납득이 가능한것.







여러모로 관리하고 신경써야 할 것이 많아진 상황이었기에, 


이 당시 신라의 군주는 굉장히 정력적일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진평왕 초창기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판세가 유지가 되어서, 


백제 무왕이 무려 4만 군세로 작정하고 쳐들어온것을 막아내거나,


고구려 영류왕의 침공을 진평왕이 "직접" 친정해서 격파하는등, 선대의 위상을 이어가는듯 하긴 했으나





진평왕이 기력이 쇠한 말기 시점부터는 대처가 빠릿빠릿하지 못하며 야금야금씩 밀려나갔고,


하필 그 뒤에 즉위한 사람이 선덕여왕이었다.






6.jpg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선덕여왕에게 동정적인 이야기를 먼저하자면 위에 언급한 대로 이 시기 신라는 국정 난이도가 너무 높기는 했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군주가 즉위해서 대단히 정력적으로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최선의 결과를 낼거라고 장담할 순 없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은 아주 뛰어나지도 않았고, 그것까진 그렇다쳐도 일단 기본적으로 정력적이지도 못했다.


이런 시대에 있어 이는 정말로 큰 결점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런 시대에 왕이 꼭 무조건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유능해야 할 필요까진 없지만, 


왕이 정력적이지 못한건 분명히 큰 문제였다.





미디어믹스의 묘사로 종종 선덕여왕이 젊은 느낌으로 묘사될 때가 많으나, 


여러 정황을 보면 선덕여왕은 최소 40대 이상의 나이에 즉위헀던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은 늙은 할미 운운하기도 했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즉위 5년 뒤 병에 걸린다. 상당한 중병이었던것 같고, 의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애초에 여성 군주라는 점만으로도 국정 운영에서 손해를 보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데, 심지어 건강하지도 않았으니


숫제 늙고 아픈 여자의 몸이 되어 국정 운영을 맡는 상황이었다.





고구려와의 국경은 불안한데 옆의 백제 무왕과 의자왕은 모두 야심만만하기 짝이 없는 군주들이고...




심지어 자연재해까지 이때 신라는 유독 심해지는데 완전히 속수무책이었다.






선덕여왕에겐 현실적인 해결 방법이 없었다. 항상 골골 하는 형편이라 아픈 몸으로 건사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내놓은 해결책은 불교에 전념하는 것이었다.



목탑을 쌓고, 불교 행사를 열고, 기도를 하며 적이 물러나길 바랬다.







1.PNG (장문) 이야기 신라사 - 200년이 넘을 동안 암군이 없었던 나라가 있다?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2.PNG (장문) 이야기 신라사 - 200년이 넘을 동안 암군이 없었던 나라가 있다? 당대 거의 무적에 가까웠던 진흥왕 시기의 신라

 




물론, 이런 신앙적인 모습을 단순히 선덕여왕이 홀려서 라기보단


정치적인 목적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입지가 좁아져 뒷배가 부족한 선덕여왕으로선 불교계의 힘을 빌리는것이 최선이었다는것이다.



일리가 없진 않으나, 이는 여러가지 다른 방법과 함께하면 몰라도


그 자체로는 이런 시대에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니 불교계의 지지라도 더 얻기 위해 불교행사를 더 열고,


불교 행사를 여니 경제력과 국방력이 떨어져 정치적 입지가 줄고,


그 정치적 입지를 채우기 위해 불교행사를 더 열고... 



그야말로 연쇄지옥이 아닐 수 없다.






늘 아파서 누워있고 대외상황은 엉망진창이다보니


"비담의 난" 같은 내부 반란까지 일어나며


파탄난 대외 국방전선 상황, 무너진 경제력, 처참해진 민생, 내부 혼란까지 벌어질 수 있는건 다 벌어지고 만다.




진흥왕 시기까지만 해도 전성기라고 불리던 나라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려운 수준을 떠나 숫제 "멸망할 지경이다" 라는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위기에 빠진건 


이런 온갖 문제가 겹친 탓.






최소한 진흥왕 시절부터 다져놓은 정책 때문에 지방민의 저항이나 반란은 거의 없었던만이 유일한 좋았던 점 정도.


실제로 이 당시에 죽죽, 용석 같은 지방 토착민들이 오히려 끝까지 항복 안하고 백제에 장렬히 싸우다 전사해서 죽고 

처자들이 보상을 받곤 했는데




만약 이때 지방민들마저 딱히 신라에 충성을 바칠 생각없이 금세 백제에 넘어가고 했다면


40~50성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라 눈깜짝할 사이에 나라가 망해도 이상하진 않았을 것이다.

5 Comments
갓김치 2022.03.18 16:25  
신라 땅들을 보면 백제에 비해 비교적 산지가 많은데
당연하게도 인구도 적었을 것이라 판단됨.
그 상황에서 난국을 극복하고 (비록 당을 끌어들였지만) 삼국통일을 한 것은
신라 입장에서만 생각할 때 대단한게 맞는 거 같음.

반대로 고구려, 백제도 실력이 있었을 때 왜 통일을 하지 않았을까 ? 라는 생각도 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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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아윤 2022.03.19 01:05  
[@갓김치] 저는 역사는 잘 모르지만 끝에서 두번째 지도를 보면서 왜 경상도라고 하는지 짐작이 들더군요. 님이 말씀하신것처럼 산지가 많은 경상도에서 사벌주가 현재 상주인데 저곳의 생산력을 기반으로 험한 소백산맥(추풍령,문경새재 등)을 넘어 한강유역까지 진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드네요. 물론 실제 상주는 평야가 아니라 대구 같은 분지로 알고 있지만 지금도 저쪽이 쌀이 많이 나는거로 아는데 삼국시대에 저길 신라가 틀어쥐고 있었으니...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신라 입장에서 전성기때는 정말 대단했던게 맞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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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김치 2022.03.19 08:46  
[@권아윤] 댓글 읽다가 든 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당시는 농경이 주 였기 때문에 고구려나 백제가 차지했던 백두대간 좌측(서해안측) 평야지대가 중요했기에
신라가 백두대간 우측(동해측)을 점령해도 크게 개의치 않았을 거란 생각도 들면저.

그래도 영토인데. 쌀을 생산하기 어려운 산지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포기할 수 있었을까 ? 라는 생각과.
서해안 평지(쌀 생산 많으니 당연히 인구도 많았을... )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신라에게 땅을 내어준 고구려 백제의 무능일지.. 진흥왕의 대단함일지..

역사뽕 받아서 급발진 해봤습니다. ^^;;
LUCY 2022.03.18 16:49  
신라장군 이사부 지하에서 웃는다 독도는 우리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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띵디디딩띵딩딩 2022.03.18 22:59  
나중에 읽을거 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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