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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북한, 중국, 소련 관계의 분석

한대치겠다 0 2237 4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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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을 통해 조소 관계의 전반적 재편이 이루어졌다결정과정에서 북한의 지도부는 스탈린의 허가를 구하면서 마오쩌둥의 동의와 위기 시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부대조건으로 획득해야 했다.

 

북한은 개전의 주도자였으나 결정자는 소련이었으며중국은 협력자이자 후원자였다개전 시점에서 전쟁의 3대 요소인 병력무기작전 중 북한이 스스로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은 병력의 일부뿐이었다무기와 작전은 소련이 제공했으며중국은 국공내전에서 단련된 3개 사단 병력을 제공함으로써 북한군의 주력을 형성했다.

 

북한은 전쟁의 수행과정과 주요 전역국면에서 독자적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1950년 9월 말 10월 초 스탈린과 마오쩌둥에게 보낸 김일성 ․ 박헌영의 편지는 소련의 지원과 중국의 참전 없이는 생존 불가능한 북한군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스탈린이 취한 태도는 공산세계의 최고 결정자로서의 위상을 스스로 허무는 것이었다스탈린은 전쟁 내내 마오쩌둥과 김일성을 통제하며 주요 결정을 내렸지만대내외적으로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으며용의주도하지도 체계적이지도 못했다개전을 승인했지만유엔군의 파견을 결정할 유엔안보리를 보이콧했고미국의 대규모 파병을 방치했다전투계획조차 작성할 수 없었던 북한군에게 반드시 필요했던 소련 군사고문단의 38 이남 월경 및 전선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했고인천상륙작전 이후 파병과 무기제공을 요구하는 김일성의 간절하고 긴급한 요구를 중국공산당에 미루는 한편 심지어 북한정권의 포기까지도 고려했다.

 

스탈린은 완벽하게 김일성과 북한을 통제했다스탈린의 결정과 지시가 없는 주요 문제의 해결은 존재하지 않았다김일성은 50톤의 빵을 북한에 제공한 스탈린에게 아버지와 같은 배려” “형제애의 발로” “존경하는 영도자요 스승이신 귀하의 만수무강을 기원했지만소련공산당은 주 북한 소련 대사 라주바예프가 제안한 김일성의 휴전협상 관련 타스통신 인터뷰 제안을 거부했다북한과 중국이 휴전회담에 성급함과 초조함을 표출할 우려가 있다는 등의 이유였다.

 

통신사 인터뷰의 자율성조차 없는 김일성과 북한은 모든 군수물자 및 구호물자를 소련과 중국에 의지해야 했다공개된 구소련 외교문서 가운데 북한이 소련에 보낸 대부분의 문서는 각종 총포 등 무기류탄약항공기기술자재 등의 소요 목록이었다스탈린은 두 사람에게 자신의 휴전협상 원칙을 강요했고마오쩌둥은 조선인민의 희생을 댓가로 38선 지역의 입지를 강화하고 북조선과 북동지역이 사수된다며 휴전에 반대하라고 김일성에게 강요했으며김일성은 마오쩌둥의 판단에 동의하며 군사행동을 위해 고사포부대 강화공군 강화 및 공중전 범위 확장국지전 병행 등이 필요하다고 답했다스탈린은 미국의 휴전제안은 물론 멕시코의 휴전제안도 미국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며 거부할 것을 지시(1952. 9. 17)했는데형식은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멕시코의 휴전제안에 대해 보고한 후 스탈린의 재가를 받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스탈린과 마오쩌둥은 북한의 의견을 구하지는 않았다공개된 구소련 외교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완강하게 북한의 종전 의지를 억제했다스탈린 사후 급속도로 휴전회담이 재개되었지만소련은 김일성의 휴전회담 서명식 참석 여부도 결정했다소련은 김일성에 대한 남한 측의 공격 가능성과 수상의 위신을 내세워 휴전회담 서명식 직전 김일성의 참여를 봉쇄해야 한다고 결정(1953. 7. 3)한 후 이를 김일성과 펑더화이에게 통보(1953. 7. 24)했다김일성은 수상 신분으로 판문점으로 가서 휴전협정에 서명하는 것이 필요치 않다는 소련의 결정에 복종해야 했다.

 

한국전쟁기 조중관계를 보여주는 시금석은 두 가지였다첫 번째는 1950년 12월 구성된 조중연합사령부였고두 번째는 1950년 11월말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전개된 중국인민지원군의 제2차 전역과정이었다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지휘권을 이양한 것과 마찬가지로 북한군 역시 지휘권을 중국인민지원군에게 이양했다이러한 지휘권 이양은 마오쩌둥의 직접 요청으로 이뤄졌으며펑더화이가 사령관 및 정치위원을인민군 총참모장 김웅이 부사령관을박일우가 부정치위원을 담당했다철저한 비밀 속의 조중연합사령부는 북한에게 굴욕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조중연합사령부의 해체시기는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으나상당기간 지속되었다휴전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은 총 34개 사단 이상이 북한에 주둔했으며 1958년에 이르러 완전 철군했다아마도 북한은 이 시점에서 군사주권을 회복했을 것이다.

 

한편 중국인민지원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재점령했다유엔군은 공산군을 상대로 휴전제의를 하는 한편 한국정부를 제주도로 이전시킬 계획을 검토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었다김일성과 주 평양대사관은 이 기회에 유엔군을 부산까지 밀어붙여 무력통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펑더화이는 유엔군의 공습병참보급선의 지연전투부대의 피로 및 휴식필요 등을 이유로 더 이상 진격을 중단했다공개된 러시아문서는 중국이 서울을 점령한 후 최초의 참전목표인 38선 방어라는 전략적 방침에 따라 서울을 포기하고 북으로 철수했다고 쓰고 있다중국은 북한군이 동부전선에서 38선을 월경해 미군을 공격하려는 작전도 지원하지 않았다이는 김일성과 펑더화이 사이에그리고 스탈린 사이에 첨예화된 모순을 자아냈다최초 중국의 참전 목적이 북한군의 무력통일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38선의 원상회복과 한반도내 완충지대 설정이었기 때문에 스탈린은 결국 펑더화이의 결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측 자료는 중국이 북한의 내정에 간섭하는 수많은 정황이 발생했는데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 당국의 정책을 비평하는 한편 북한군 지휘관을 포섭하려고 했다고 기록했다그 실례는 조중연합사령부 부정치위원이던 박일우로김일성은 그가 마오쩌둥의 개인적 대표처럼 행동하며조선로동당의 권위를 훼손하고 자신이 당위의 인사처럼 행동했다고 비판했다소련은 중국이 대국주의’ 태도를 드러냈다고 썼다.

 

한국전쟁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련과 스탈린의 영향력은 북한에서 감소될 수밖에 없었다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스탈린의 한국전쟁 태도는 이후 조소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국제공산주의운동의 최고결정자로서 스탈린은 전쟁의 주요 결정권을 행사했지만북한의 운명이 달린 결정적 순간에 최고결정권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특히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은 조소관계가 수직적 동맹관계에서 수평적 관계로 변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중국은 많은 것을 잃었다개전 당시 소련은 유엔안보리에서 대만을 축출하고 중국을 대체할 것을 주장하고 있었지만중국은 한국전 참전으로 최소 20년 이상 국제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반면 중국은 국제공산주의운동의 유력한 지도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으며미국 등 유엔군의 공격을 한반도 내에서 저지함으로써 중국 본토와 공산혁명을 보위할 수 있었다또한 거의 전적으로 중국과의 연대에 사활적 이해를 건 형제국가 북한을 자신의 영향력 하에 두게 되었다.

 

전후 소련과 중국은 북한의 유일한 원조국가였다소련은 1953년 9월 19일 조소협정에 따라 2년 동안 무상원조 10억 루불신용차관 2.98억 루블(1957년부터 10년간 상품으로 상환연이율 1%), 1950~53년간 북한의 채무 50%(7천 288만 루블)을 감면해 주었다중국은 1950년 개전 이래 1953년말까지 북한에 72,900억 원(14.5억 루블)을 무상으로 원조했으며, 1954~57년간 북한에 80,000억 원(16억 루블)을 제공하기로 했다.

 

김일성은 전쟁의 개전과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였고지휘권마저 중국군에 이양한 상태였지만역설적으로 한국전쟁을 통해 권력강화에 성공했다스탈린의 사망 직후 소련파로 당조직을 장악했던 허가이의 자살을 시작으로 박헌영남로당에 대한 대대적 숙청과 연안파 숙청이 계속되었다이러한 숙청작업이 소련과 중국의 영향력이 강력한 상태에서 이루어짐으로써 김일성은 이후 배타적 권력보유자가 될 수 있었다. 1956년 8월 조선로동당 전원위원회에서 연안파가 김일성 빨치산파에 반기를 든 ‘8월종파사건이 발생했을 때 마오쩌둥은 연안파를 보호하기 보다는 북한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를 결정했다이것은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전한 진정한 선물이었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6.25 전쟁/전쟁의 전개의 1. 북한의 기습 남침 파트에 제시된 사진

 

내용출처

정병준한국전쟁 휴전회담과 전후체제의 성립.」 한국문화연구, 2019.

https://scholar.google.co.kr/scholar?hl=ko&as_sdt=0%2C5&q=%ED%95%9C%EA%B5%AD%EC%A0%84%EC%9F%81+%ED%9C%B4%EC%A0%84%ED%9A%8C%EB%8B%B4%EA%B3%BC+%EC%A0%84%ED%9B%84%EC%B2%B4%EC%A0%9C%EC%9D%98+%EC%84%B1%EB%A6%BD&bt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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