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인조를 둘 다 저주한 왕비 인목왕후 김씨


인목왕후 (仁穆王后)
조선 14대 국왕 선조의 계비(2번째 왕비)로 광산 김씨 출신, 영창대군과 정명공주의 어머니이며 조선의 왕비들중 왕대비로써 유일하게 유폐 되었다가 복권된 첫 인물임.
1584년 12월 5일 한양(서울)에서 부원군 김제남과 정실부인 노씨의 3남 2녀 자녀들중 셋째딸로 태어났음. 행장에는 어린 시절 활발하고 유순한 성격이였다는데 광해군 재임 시절 왕대비, 선조 시절 왕비 재임 당시 행보를 보면 그냥 '철이 없다' 로 정의가 가능한 수준임.
1602년 8월 29일,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 박씨(1555~1600)가 승하하고 2년뒤 자신보다 29살 많은 선조의 두번째 왕비로 간택되어 혼례를 치루게 됨. 당시 김씨의 나이는 19세로 조선시대 평균 여성의 초혼연령보다 매우 늦은 나이였음.
이 시기가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기라 김씨 역시 10대 후반이 되도록 결혼을 못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선조는 당시 왕세자 광해군과 갈등이 있었기에 정궁 왕비로부터 적자를 얻고 싶은 욕심이 강했던것으로 보여짐.
당시 선조의 나이는 51세로 정비 의인왕후와 사이에 자녀는 없었으나 후궁들로부터 아들 11명, 딸 10명을 봤고 손자,손녀들까지 있는 할아버지였음.
한편 선조, 인목왕후의 혼례날 마른 하늘에 장대비가 떨어져 사람들이 새 왕비의 불행을 미리 예측했다는 말이 있음.
이렇게 왕비가 된 인목왕후는 당시 선조가 가장 총애하던 후궁 인빈 김씨(1555~1613), 정빈 민씨(1567~1626) 등을 밀어내고 선조의 총애를 독차지했음.
왕비가 되고 1년뒤 바로 큰딸 정명공주(1603~1685)를 낳았고 그 다음해에 공주를 낳았으나 사산하게 됨.
1606년 아들 영창대군을 낳게 되면서 인목왕후의 행보도 꼬이게 됨(...) 선조가 안그래도 왕세자인 광해군을 멀리 하는데 철이 없는 어린 왕비여서 그런건지 모르나 여러 말도 안되는 행보를 보임
(1)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남편 선조에게 '이 아이를 대군으로 할것입니까, 아니면 왕세자로 할것입니까?' 라고 물어보는 실책을 저지름.
(2) 왕세자인 광해군이 있는데 대군에게 왕세자만이 입을수 있는 옷을 입힘.
(3) 동궁전(광해군의 처소) 나인의 절반을 영창대군의 처소에 배치시켜 왕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행동을 보임.
결국 이런 행동이 나중에 광해군 즉위 후 어린 영창대군이 처형되는 결과를 만들었음.
1613년 59세의 선조가 승하하게 되는데 왕실의 법도상 차기 후계자는 선왕의 중전 혹은 살아있는 왕대비, 대왕대비가 정하게 되어 있었음.
당시 명종비 인순왕후, 인종비 인성왕후는 이미 서거했기에 왕비였던 인목왕후가 왕실의 최고 어른이였고 그녀는 뒤늦게나마 정명공주, 영창대군의 안전을 위해 교지를 내려 광해군의 지위를 인정해줬고 선조 승하 후 그가 즉위하도록 돕기도 했음.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30세 젊은 나이에 왕대비가 된 그녀는 소성왕대비라는 존호를 받고 이후에도 광해군을 자극하는 여러 행보를 보임.
(1) 아들 영창대군이 정식적으로 군호를 받을때 광해군은 '영창' 이라는 호는 전국옥새에 들어가는 군주만이 쓰는 호이니 고치자고 했으나 소성대비는 '선왕(선조)께서 내리신 호이니 절대 고칠수 없다' 라고 반대함.
(2) 이후 옷을 광해군의 아들인 세자 이질보다 과할정도로 화려하게 입히고 재물에 집착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들어가면서 과도하게 축적하는등의 행보를 보임. 계축옥사 당시 도성 양반의 8할이 그녀의 왕대비 폐위를 지지할정도로 민심을 잃을정도였음.

심지어 선조의 첫 왕비 의인왕후(1555~1600)의 무덤에서 친정아버지 김제남이 당시 국왕이던 광해군을 저주한건 이변이 없는 사실이라 친정이 통채로 쓸려나가고 본인도 왕대비에서 폐위되어 덕수궁에 유폐당함.
정확히 말하면 광해군 일가가 재건된 창덕궁으로 이사가고 인목왕후(소성대비)만 덕수궁에 정명공주만 남게 된것임. 정식적으로 광해군의 왕대비 폐위 교지가 내려진건 아니지만 사실상 그 당시 암묵적으로 왕대비 김씨는 더이상 왕대비가 아니다라는 결론이 내려진듯함.

사실 이는 조선이 효의 나라였기에 인목왕후는 운좋게 목숨을 건진것이나 다름 없었음. (전)왕조인 고려시대는 일부다처제였기에 왕들이 여러 왕비를 들였고 왕이 승하할때 현왕의 모후(왕태후)를 제외한 선왕의 왕비들은 전부 왕대비로 책봉함.
원종의 2번째 왕비 경창궁주 유씨는 의붓아들 충렬왕을 저주한 사실이 들통나서 충렬왕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당하고 아들과 같이 폐서인이 되어 유배를 가던 중 제국대장공주 일파의 지시로 암살되었으며 선종의 3번째 왕비 원신궁주 이씨 역시 친정이 이자의의 난에 연루되어 왕대비에서 폐서인 되어 유배를 당함.
옆나라 중국의 경우에도 원나라의 경우 권력암투가 심해 황태후, 태황태후도 폐서인당하여 암살, 처형당한 경우가 있을정도였음.

이렇게 덕수궁에 유폐된 그녀는 정말 가난한 생활을 경험하게 되는데 아들, 친정을 잃은 뒤 소복만을 입고 생활하고 식사를 위해 궁안으로 들어오는 생선, 육고기, 쌀을 모두 거부한뒤 미음만 먹으면서 생활했다고 함.
당시 허균이 광해군의 명으로 대비 김씨를 처형하려고 군사들을 이끌고 서궁에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고 그녀는 남은 딸마저 잃을까봐 정명공주를 이미 죽은것처럼 꾸미기도 했음.
그러던 중 인조반정이 터지게 됨. 처음 그녀는 인조반정을 믿지도 않았고 반정군들을 신뢰하지도 않았음. 그러다가 능양군(선조의 손자, 인조)이 직접 찾아오자 그제서야 반정을 믿게 되었음.
인조반정 당시 반정군, 인조에게 그녀가 남긴 말은 "광해군 부자의 목을 잘라 내게 가져와라, 내가 직접 그냥 목을 직접 자르겠다. 두 부자의 목을 자르기 전에는 절대로 반정을 허락할수 없다" 라는 말까지 남김.
이정도로 광해군에 대한 감정은 살벌했고 폐모살제로 북인을 제외한 서인, 남인, 사람의 지지를 상실한 광해군은 경운궁 석어당 앞에 끌려나와 무릎을 꿇은채로 김씨의 폐위 교지를 받고 왕의 자리에서 쫒겨남.
새로 즉위한 인조(능양군)는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의 아들로 그녀에게는 항렬상 손자뻘이라 반정 이후 대왕대비로 책봉되었음. 이후에는 기존에 유폐되어 살던 덕수궁에서 본궁인 창덕궁으로 다시 돌아옴.
반정 이후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고 싶어 왕실의 일에 여러번 관여했는데 여러 정치적인 의제에 한글로 교지를 내려 자신의 생각을 표명하고 궁밖에서 지내던 인조의 아들들을 궁으로 들어오도록 명하는 등 반정의 상징이였기에 인조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림.
특히 서궁에 같이 유폐되어 21살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딸 정명공주에 대해 대신들이 지나치다라고 말할정도로 딸의 결혼 당시 여러 전례를 다 깨부수는 행동을 보임.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자신의 집권정통성을 상징하는 김씨를 우대하여 정명공주의 혼례를 역사상 전례없을정도로 호화롭게 치뤄줬고 그뒤에도 공주의 남편 홍주원의 품계를 높여주고 공주에게 땅, 재산을 하사하는 등 우대했음.
현대로 치면 강남의 초호화 건물 수십채랑 일반 기업 사업체를 신분을 이용해 낙하산으로 공짜로 준 셈이라 말들이 나올수밖에 없었음.
이렇게 인조가 그녀를 극진히 대해줬음에도 인목왕후의 불만은 있었음. 인조반정 이후 인목왕후의 목표는 딱 2개였음.
1. 정명공주에게 뭐든지 최고로 잘해주기
2. 광해군 일가를 모두 사형시키기
인조의 입장에 1은 가능. 그러나 2는 한때 군부였고 전 국왕이였으며 인조에게는 삼촌인데 폐위되었다고 사형을? 너무 정치적으로 부담되는 일임.
이후 인목왕후(대왕대비)는 인조의 저주까지 가담함. 어이없게도 현왕의 저주행위로 대비 자리에서 쫒겨났던 양반이 대왕대비로 복권되자 다시 저주행위를 시작한것임.
이 일은 그녀 생전에 밝혀지지 않았으나 사후에 드러난 엄연한 사실임.
인목왕후는 1632년 8월 13일 47세 나이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서거함. 집안의 여자혈족들이 70, 80살(어머니 노씨는 81살에 사망)까지 살았던것에 비해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서궁(덕수궁)에 유폐되었을 당시 식사를 거르고 늘 누워있다보니 몸이 약해졌고 결핵을 얻었는데 별세 당해부터 몸이 급격히 안좋아졌음.
문제는 대왕대비였던 그녀가 서거했으니 생전에 쓰던 처소(거주지)를 정리해야 함. 그런데 거기서 인조와 왕비 인렬왕후를 저주하는 물품들이 잔뜩 나와버림..
일단 왕의 폐위를 기원하는 부적은 대왕대비가 광해군이 군주였을때 서궁에서 만든거고 아직 들고 계셨다라고 넘김.
그런데 선조의 서자 경평군의 아들 양녕군이 연루된 역모사건이 터짐. 심지어 소성대왕대비(인목왕후)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다는 고변까지 들어옴.
참고로 인조반정 이후 조선왕조에서 선왕의 왕비, 즉 대비는 왕이 절대로 못건드리는 천상계 위치에 오름. 특히 인목왕후(소성대왕대비)는 인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존재라 인조는 무조건 이 일을 덮을수밖에 없었음.
덮지 않는다면 대왕대비가 인조의 왕위 계승을 부정한다라는 논제가 참이 되버림.
문제는 이후 인조의 모든 의심이 그녀의 딸 정명공주에게 향했음. 인조는 정명공주 자택의 궁녀들을 잡아 압슬형(무거운 돌로 무릎관절을 박살냄)까지 시행했으나 궁녀들이 말하지 않았고 반전공신들이 인조를 말려서 살아남았음.
이후 공주는 효종 시절 발생한 귀인 조씨의 저주사건 당시에도 귀인 조씨와 내통해서 왕대비(장렬왕후)와 국왕을 저주한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고 현종 재임기까지 아예 정치와 떨어져 조용히 지내야 했다고 함.
결국 이 저주사건을 책임져야 할 인물들이 필요했는데 인조는 이 일의 범인을 선조의 후궁 소원 윤씨(1580~1632)와 선조의 후궁 상궁 상궁 정씨(1585~1632)한테 뒤집어씌움.
소원 윤씨는 본명이 '윤귀희'로 선조가 노년에 들인 후궁임. 원래 궁녀 출신으로 선조 생전 그 신분이 승은상궁이였는데 선조가 임종하면서 왕비 김씨에게 정식적으로 후궁첩지를 달라고 했고 선조 사후 종4품 숙원으로 책봉됨.
인목왕후의 최측근이였고 선조 승하 후 출궁해서 지내다가 인조 즉위 후 다시 입궁해 인목왕후를 모셨음. 슬하에 자녀도 없었기에 아무리 국왕이라도 선왕의 후궁을 사형시키는건 부담이 있었지만 그녀는 자녀도 없어서 부담도 없었음.
또다른 선조의 승은상궁 정씨와 함께 인조는 소원 윤씨를 이 일의 배후로 몰아 국문을 실시한 뒤 폐서인시켜 궁밖으로 내쫒아서 사사(사약을 내려죽임)시킴으로써 이 일을 종결함.
향간에는 인조의 편집증에 가까운 성격이 안그래도 왕으로써 약한 정통성과 재임 초에 있던 저주, 역모사건이 원인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음. 자신의 즉위를 도와준 할머니(인목왕후)도 결국 자신을 폐위시키려고 했기 때문임.
향간에는 그녀를 역사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기록으로 봤을때에는 사실상 쉴드를 쳐줄수가 없는 정치적인 능력조차 없는 비호감 그 자체라고 볼수 있음. 어떻게 보면 자업자득 그 자체
효의 나라 조선의 왕비였기에 살아남은거지 고려나 원나라의 왕비, 황후였으면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웠을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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