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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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결말[편집]
장지량 공군참모총장과 강기천 해병대사령관이 현지에 달려갔고, 국방부에서는 합동수사반을 구성하여 현지조사에 나서게 하였으며, 해병 20명과 공군 14명을 연행하여 조사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잊히고 해병대 출신의 회고글 혹은 해병대의 각종 야사 썰들을 모아 놓은 해병대 출신들의 블로그 등에서나 언급되는 정도이지만, 사건이 발생한 당시에는 주요 일간지에 관련 기사가 도배가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큰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정부와 군 상층부에선 처음에 관련자 전원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고도 했으나, 당시에는 베트남 전쟁 상황이라 장교들이 많이 필요한데 관련자가 너무 많아서인지 주동자들만 군사 재판에 회부하고 사건을 넘기고 말았다. 그런데 그 주동자인 전도봉도 퇴학당했지만 월남전으로 인해 복귀하였으니 실제 처벌 받은 사람은 없다. 전도봉 소위는 일단 이 사건의 주동혐의로 현역부적합전역했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얼마 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전도봉에게 현역 대한민국 육군 병 입영통지서가 발부되었고 이에 전도봉은 "장교로 군복무했던 사람이 뭔 현역병이냐!"고 반박하는 바람에 불명예 전역자 주제에 계급을 그대로 인정받고 복직되었다.
해병대 측의 주동자였던 전도봉 소위와 당시 공군 비행학교 당직사관이었던 이양호 대위는 30년 후 각각 해병대사령관과 국방부장관으로 해후(?)하게 되며, 공교롭게도 둘 다 임기를 채 못 마치고 재직 중 비리 및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된다(…). 근데 여러 해병 출신들이 전도봉 장군은 뇌물혐의 무죄 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여기저기에 우겨대서 정말 무죄 판결을 받은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것 역시 구라다.
전도봉 장군도 엄연히 대법원 최종심에서 뇌물혐의 유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그런데도 아직도 많은 해병 예비역들은 전도봉 장군을 진정한 해병, 위대한 사령관 중 한 분으로 추앙한다. 근데 추앙받는다는 분이 해병대사령관 이취임식엔 초대받지 못하는 기수열외를 당하고 있다.[9]
전도봉의 회고록에 따르면, 위 사건을 주도한 똘끼깡을 인정받아, 월남전에서 해병대 수인(囚人, 죄를 지어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로 구성된 해병대 수인소대(...)의 소대장을 맡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수인소대는 깡패 출신들은 깡다구와 용기 하나는 강할거라고 생각해서 위험한 임무를 맡기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해병대 수인소대원들이 하도 말을 안들어 수인소대의 깡패 두목을 영창에 보내자 소대원들이 우리 두목 다시 데려 오라고 전도봉 장군 앞에서 집단으로 안전핀 뽑은 수류탄 들고 설쳤다는데 말빨로 제압했다고 한다. 그리고 깡패 출신들은 깡 하나는 좋아서 전투시에 용감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전투가 벌어지면 해병대 수인소대원들은 제일 겁쟁이가 되어버렸다고 한다. 반면 실제 전투시에 가장 용감하게 잘 싸우는 병사는 모범적이고 평범한 부류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도봉의 회고록엔 의심 가는 점들이 많다. 당시 사회의 "문제아"(사회운동가, 사회불량배)들을 "군대 갈래, 깜방 갈래?"라는 반강제 조건으로 소집한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여기서 해병대로 징집된 사람도 있을것이다. 게다가, 당시 해병대에는 징집기수도 존재했다.[10] 다만 월남으로 간 파병장병들은 전원 지원자였다. 오히려 전도봉이 소대장이던 시절에는 파병 보낼 해병대 장교는 모자랐어도 파병을 원하는 병들은 넘쳐났었다. 해병대 뿐만이 아니라 육해공군에서도 해외 파병은 사회 진출시 경력을 인정받기 좋은 기회고 월급도 꽤 나왔기에 가고 싶어도 못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후진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전과가 그렇게 심하지 않을 경우 쉬쉬하는 경향이 많고 전과자를 크게 차별하지도 않았기에 해병대 뿐만이 아니라 육군에도 전과가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 사람들로만 구성한 "수인소대"가 있었다는건 심히 의심해야할 상황이다. 상식적으로 수인들로만 소대를 만들만큼 많은 전과자들이 파병되었는지도 의심스럽다. 실제로 같은 시기 제2해병여단(청룡부대) 출신 참전용사도 수인소대는 처음 들어본다는 말을 한다. 청룡부대는 당시엔 여단규모라 그리 크지 않았으니 수인소대같은 파격적인 게 있었다면 모를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내용은 과장되었거나 전도봉이 지어냈을 가능성이 높다. 몇몇 전과자 출신 파월장병이 존재했다는 것을 "수인소대" 혹은 "형벌소대"로 과장시켰다면 오히려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해병대, 그리고 특히 국가 유공자들인 해병대 파월장병들의 위상을 깎아먹는 비겁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깡"으로 인정받아서 운좋게 파병가는 걸로 끝났다는 식으로 적혀있는데, 워낙 파병 인원이 많았던 육군의 경우는 장교가 부족해서인지 밀수나 비교적 가벼운 범죄로 걸린 장교들 중 일부가 징계나 재판을 받는 대신 파월로 형을 때우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밀수도 심각한 범죄다. [11]
즉 병 출신이든 장교 출신이든 골수 해병들의 허풍과 이빨은 믿을 게 못된다. 워낙 허풍 구라 소설들을 잘 지어내기 때문이다.
5. 왜곡[편집]
사건 자체만으로만 보아도 일단 명백하게 해병대 소속 여러 장교들이 군법적으로 심각한 범죄 행위를 저지른 것이며, 알량한 '자존심'의 논리로 보아도 해병대가 자고 있던 공군에게 비겁한 기습을 했음에도 결국 공군에게 처발린, 해병대로서는 참으로 치욕적인 흑역사 수준의 사건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황당한 사실은 21세기인 지금에 와서도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건을 정반대로 왜곡하여 마치 해병대가 이긴 무용담인 것처럼 날조한 여러 버전의 구라 소설들이 예비역 해병들의 블로그 등을 통해서 퍼져졌다.
사실, 왜곡 소재 대부분이 당사자인 전도봉 사령관의 일대기에서 나왔으니 당연하다. 인터뷰를 보면 자신이 소시적에 조폭을 때려잡았다고 주장하거나 월남에서 있었던 황당한 일 등, 해병대 시절의 믿거나 말거나 식의 허풍스러운 무용담 일대기 중 한 일화로 끼워서 말하였다. 이런 구전 이빨에서 흔히 나오기 마련인 허풍, 왜곡과 변명을 토대로 후대의 해병들이 거기에다 더 보태고 조작하여 쓴 해병대 특유의 정신승리성 소설들인 것이다.
예를 들면, 아래과 같이 왜곡시키는 식인데… 사실 조작과 역사 왜곡은 기본이요, 군범죄 정당화, 상급 지휘관에 대한 하극상, 전우의 죽음에 대한 박대까지 어우러져서 헛웃음이 나오는 훌륭한 무협지블랙 유머가 되어버렸다(…). 자신들은 자랑이라고 이빨까고 있는데, 읽는 입장에서는 너무 빈틈이 많아 오히려 웃기는 글이다. 아래에 나오는 해병측 주장의 신뢰도는 구라와 팩트 왜곡 투성이다.
35기 소위들의 김해공군기지 습격사건 66년 8월 8일에 발생했던 이른바 해병학교 사관 35기 기초반 장교들의 김해 공군기지 습격사건의 진상을 공개한다. 그리하여 6시에 기상하여[29] 막사[30] 안팎에서 내무정돈과 세수를 하고 있는[31] 약 50명의 조종반 장교들[32]을 닥치는 대로 주먹과 내무실에 있는 운동기구 등으로 가격하여 일방적인 완승을 거두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고[33], 그 현장에 버스를 타고 왔던 약 40명의 3제대 장교들이 도착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시각에 갑자기 터진 연막탄을 신호로 전 기지의 장사병은 즉시 상의를 벗고[34] 중앙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방송이 사방에서 들리자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기초반장교들은 몇몇 간부장교들의 의견에 따라 즉시 비행학교 당직실이 있는 학교본부로가서 정열을 했다. 맨 뒤쪽에 쳐져 맥없이 껍북거리고 있는 이 소위를 발견하여 늪 밖으로 끌어낸 사람은 김무일 소위와 이무수 소위였고, 이강오 소위를 비롯한 3~4명이 그를 살리기 위해 인공호흡을 시도해 보았으나 이미 입과 항문이 열려 있는 그를 되살릴 수는 없었다.[40] 결국 공군기지 내의 의무중대로 운반이 된 이 소위는 7시 50분 그를 검안한 군의관에 의해 사망이 확인되었는데, 그 때 그 의무중대 병실에는 부상을 당한 20여 명의 비행종대 피교육 장교들과 12~13명의 해병학교 기초반 장교들이 엠불란스에 실려 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음은 이 사건이 남긴 사법적인 처리문제와 관련된 비화이다. 진해교육기지사령부에서는 전도봉 소위를 비롯한 6명의 주동자를 구속하는 한편 35기 기초반중대의 중대장 송모 대위와 구대장 3명도 구속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그런데 그러한 조치와는 달리 약 한 달 전[41]에 제7대 사령관으로 취임했던 해병대사령관 장기천 장군은 엄벌에 처할 경우 특히 35기 장교들과 그 후배 장교들의 사기에 미칠 영향이 클 것으로 판단하여 사고를 낸 35기 장교들과 비행학교 피교육 장교들 간에 자매결연[42]을 맺게 하는 방안을 구상하여 공군참모총장이던 장지량 장군의 동의를 얻은 다음 그러한 수습방안을 장 총장과 함께 김성은 국방부 장관과 박정희 대통령에게 제시하여 쾌히 승인을 받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거쳐 강기천 사령관은 장지량 총장과 함께 김해 공군기지와 진해 해병교육기지사령부를 차례로 방문하여 유감표명을 했고, 그러한 토대 위에서 쌍방 간의 자매 결연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군법회의에 회부된 그 10명의 장교들[43]에 대해서는 강기천 장군이 군법회의의 설치권자인 교육기지사령관 박성철[44] 준장에게 선고유예를 하도록 지시를 했으나 박성철 장군은 자신이 임명한 재판장[45]에게 2년을 선고해주면[46] 자기도 생색을 좀 내고 강기천 장군도 감형을 할것이라고 했으나 처음부터 형을 선고할 생각을 갖지 않고 있던 강복구 대령은 군법회의의 사회자가 "재판장의 선고가 있겠습니다"라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회전의자를 뒤로 돌려 면벽[47]을 한 채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바람에 여러 차례의 선고공판이 유회되는 별 희한한 해프닝이 벌어지곤 했다.[48] 그리고 그런 운을 타고 났던 전도봉 소위는 그로부터 30년 후[53] 제 22대 해병대사령관이되어 합참의장을 거쳐 국방부장관으로 취임한 왕년의 김해비행학교 당직사관 이양호 대위와 숙명적인 재회를 했다. 전해지고 있는 바에 따르면 구속 기소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던 이양호 대위도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했다고 하니 안중근 의사가 옥중에서 써 남긴 '必死卽生'이란 글귀를 새삼 되씹어 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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