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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축지법으로 출세한 상인

불량우유 3 3093 7 1




 

 

 

구한말에 활약한 정치계 인사이자 거부이자 사업가로 불린

파천황 이용익은

원래는 보부상중 물장수를 하던 사람 이였으나

 

우연히 함경도와 강원도 일대에 금광을 발견한후

 

민비의 친족인 민영익에게

재물을 받쳐서

조선 상단을 이끌게 되고  막대한 부를 축척 했다고 합니다,,

 

이후 일본을 견제 하는 외교 활동도 하고

(물론 일본의 견제를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이려고 한것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리죠)

 

 

교육에도 관심이 많아서 1905년에 보성 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학교)를

설립 하는등 많은 활약을 한 분이죠,,

 

 

 

그런데 걍 보부상인 이용익이 출세한 이유가

그의 독특한 기술 때문인데

거리를 빠르게 이동한다는 축지법을 썻다고 합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 났을때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은 궁궐을 습격 한후

민영익의 집을 습격 했는데

 

 

이용익이

민영익을 업고 담을 타고 도망 갔는데

어찌나 빠르게 이동했는지

민영익을 죽이려던 군사들이 놀래서

그만 멍 때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이용익의 도움으로 살아난 민영익은

그를 고종에서 천거 했고 이후

 

장호원에 피신을 한 고종의 정보통 역할을 하면서

반란군들의 후미를 기습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때 그의 발은 말보다 빨랐다고 합니다,,

 

 

1884년경 이용익의 축지법에 대해서 궁금 했던

고종이

 

내가 전주에 파발을 보낸일이 있는데

그대는 전주 까지 얼만에 갈수 있냐고 물었고

이용익은 반나절이면 갈수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에 고종은 전주 목사에게 이용익이 친서를 들고오면

그 시간을 기록 하라는 파발을 보냈고

4일뒤 이용익을 출발 시켰습니다,,

 

 

그리고 거의 12시간이 안되서 전주 목사에게 이용익이 찾아왔다고 하며

인증까지 받았다고 기록되 있습니다,,

도착 했을때의 이용익은 옷만 젖고 더러웠을뿐

본인은 상당히 여유롭게 도착 했다고 함,,

 

 

 

현재 서울특별시~전주시간 고속도로 거리가 214km이고,

 

이걸 12시간안에 주파하려면 대충 18km/h로 달려야합니다,,

마라톤 선수라면 가능 할만도 할것 같은데

 

 

마라톤 선수라도 과연 그 속도를 12시간 동안 유지하면서 뛸수 있을까 라는

의문점이 들죠,,

 

 

실제로 이용익의 기록을 마라톤 기록과 비교해 보면

이용익은 울트라 마라톤의 세계기록의

2배나 되는 속도를 냈다고 보입니다,

 

 

더군다나 이때가 조선시대 였으니

현재 처럼 잘 만들어진 고속도로가 있을리 만무하고

터널도 없었으니 산을 만나면 걍 넘어 와야 했고

 

이러다 보니 현재의 서울 전주 거리와는 더 멀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조선에선 지방에서 한양까지 가려면

산을 넘는 시간도 있어서 보통 사람들은 한달 이상 걸렸다고 하죠,,

 

이후 고종이 축지법의 비결을 묻자

 

이용익은 "두루마기가 걸리적거리지 않게 잡은 다음

좀 빠르게 걷기만 하면 됩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김옥균을 암살한걸로 유명한 홍종우가 남긴 말에 의하면

 

이용익은 여유롭게 걷다가 발을 놀려

순신간에 이동 하는데

그의 발재간이 눈에 안보이고

팔랑팔랑 나부끼는 두루마기 자락만 보였다고 합니다

 

암튼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이용익은 축지법을 쓸수 있다고 주장한 사람들중

유일하게 공식적인 기록이 있는 인물 이죠,,

 




Best Comment

BEST 1 김개동  
흠.. 구란듯. 고종실록 보면 이용익이란 사람이 최소 세명 등장하는데, 내장원경이 되는 이용익(李容翊)은 고종 20년인 1883년 처음 실록에 등장하는데 단천부사에 제수됨. 이후 관력을 보면 병사를 여러번 맡아 무반직을 돌고, 광산일을 맡고 하다가 유배도 여러번 가고 고생함. 그러다 고종 35년부터 사람이 말썽은 많지만 광산을 잘 다스려 나라에 보탬이 되었으니까 등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36년에 내장원경에 임명됨. 이후 탁지부로 가서 승승장구하다가,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을 논의하던 중 (무식하여) 엄귀비를 '양귀비'에 준하여 모시자고 한 실언을 하여 반역으로 몰리는 등 위기에 빠짐. 고종의 비호로 파면하여 고향으로 보내는 선에서서 그치고 거의 곧바로 사면됨(고종 39년). 고종 40년에 다시 임용되어 탁지부 대신이 된걸 보면 재정 문제에 탁월했던 것 같은데 이후 군무도 맡고 독립운동도 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함. 실록에 졸기도 보이는데 고종이 '임오년 이래로 충성으로 일관됐다, 시호를 내리라' 한 것 외에 축지법 얘긴 전혀 없음.

또 1884년엔 이용익이 등장하는 기사가 아예 없음. 따라서 구라일 가능성이 매우 높네. 실록 20분쯤 뒤져본 결론임
3 Comments
유탈리 2020.03.15 12:45  
개소리지...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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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동 2020.03.15 12:55  
흠.. 구란듯. 고종실록 보면 이용익이란 사람이 최소 세명 등장하는데, 내장원경이 되는 이용익(李容翊)은 고종 20년인 1883년 처음 실록에 등장하는데 단천부사에 제수됨. 이후 관력을 보면 병사를 여러번 맡아 무반직을 돌고, 광산일을 맡고 하다가 유배도 여러번 가고 고생함. 그러다 고종 35년부터 사람이 말썽은 많지만 광산을 잘 다스려 나라에 보탬이 되었으니까 등용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36년에 내장원경에 임명됨. 이후 탁지부로 가서 승승장구하다가, 영친왕의 생모 엄귀비에게 존호를 올리는 일을 논의하던 중 (무식하여) 엄귀비를 '양귀비'에 준하여 모시자고 한 실언을 하여 반역으로 몰리는 등 위기에 빠짐. 고종의 비호로 파면하여 고향으로 보내는 선에서서 그치고 거의 곧바로 사면됨(고종 39년). 고종 40년에 다시 임용되어 탁지부 대신이 된걸 보면 재정 문제에 탁월했던 것 같은데 이후 군무도 맡고 독립운동도 하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객사함. 실록에 졸기도 보이는데 고종이 '임오년 이래로 충성으로 일관됐다, 시호를 내리라' 한 것 외에 축지법 얘긴 전혀 없음.

또 1884년엔 이용익이 등장하는 기사가 아예 없음. 따라서 구라일 가능성이 매우 높네. 실록 20분쯤 뒤져본 결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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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getmoon사냥꾼 2020.03.15 12:57  
중간에 말 탄거 아니냐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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