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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출신 블라인이 말하는 학업스트레스

지수 0 1320 7 0
IMG_1823.jpeg 목동 출신 블라인이 말하는 학업스트레스
그 기사보고 함 써본다. 공부를 못했어도 잘 살고 있는 아재의 이야기다. 이런 길도 있다, 이렇게도 살 수 있다고 알려주고 싶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난 서울 양대 학군지 중 하나인 목동에서 태어나서부터 서른까지 살았다.

초등학교 때까진 학교에서 날 모르는 선생이 없을 정도로 똘똘하다고 소문 났는데 중학교 가고부터 내가 공부에 재능이 없다는걸 깨달았다.

특히 과목 편차가 너무 심해서 국어 관련 과목들은 중학교든 고등학교든 전교 10등 혹은 모고 제일 못쳤을 때가 2등급 이었고 대부분 1등급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

근데 이과 과목인 수학 과학의 경우, 중학교때 과학은 상중하 중 하반(우리학굔 이동수업을 했었음), 수능이나 모고때 수학은 최고 잘본적이 3등급 이었지 대부분 4등급이었다. 내신 수학은 고딩때 가 받은 적도 있었다. 지금도 수학 가 받는 꿈 꾸는거 보면 어지간히 트라우마 였나보다 싶긴함..

당시의 나는 변명만 했었다. ’보통의 사람이 살아가는데 왜 수학이 필요할까. 산수만 하면 되는거 아닌가‘ ’과학은 배워 어따쓰지. 과학자 되고 싶은 사람만 하면 되는거 아닌가‘ ’피스톤 작동 원리는 대체 왜 배우는거야(기술과목)‘ 등등

한편으론 내가 언어 계통 과목을 좋아했던 이유가 들이는 품에 비해 성적이 잘 나와서 였던 것 같다. 수학이나 과학은 몇십만원 짜리 과외를 해도 성적이 안나오는데 언어쪽은 학원을 안다녀도 성적이 잘나오니까.

결국 지방대에 진학해서 어영부영 졸업했다. 졸업하고 취업하려고 하니 지방대론 참 취직이 어렵더라.

첫 직장은 인턴이란 명목으로 30만원 주는 곳이었는데 당시 기준으로도 최저임금보다 한참 밑이었다. 그래도 경력이나 쌓고자 감지덕지 다녔다. 지금이었으면 바로 신고했을텐데.. 7개월 인턴 기간이 지나고(이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인턴이 7개월 이란게;;) 180에 계약직으로 채용하겠다 했는데 미련없이 나왔다.

일하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난 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였다. 공부도 재능이라고 하는데 난 그 재능의 범주에 문제를 푸는 창의력은 물론이고, ’앉아있는 능력’ ‘잡생각 하지 않는 능력‘, ’하기 싫어도 하는 의지‘ 같은 것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의지가 적었음에 한탄했었고, 이제 정말 원하는 공부만 할 수 있으니 원없이 한번 해보자 싶어서 대학원에 진학했다.

솔직히 공부 라는걸 해보고 싶은 마음 30, 세탁 70 이었다. 특수대학원 말고 일반대학원이면 그래도 전일제에 논문도 제대로 써야하고, 교수 시다도 해야하니 어딜가서 대학원 나왔어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원하는 공부만 하게되니 너무너무 좋았다. 아 내 재능은 대학원에 있나 싶을 정도였다. 당시 2년은 진짜 원도한도 없이 공부했다.

대학원에서도 내가 석사생임에도 따로 공부할 수 있는 방을 내줄 정도로 착실하게, 열심히 살았다. 어두울때 연구실에 도착해서 어두울때 집에 갔다. 월화수목금토일 매일.

지도교수랑도 논문쓰고, 다른 교수랑도 논문 쓰고 메이저에 게재도 많이 했다. 교수님들은 내가 당연히 박사까지 할 줄 알았는데 안한다고 했을때 꽤나 충격 받으셨다.

졸업한지 십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스승의 날에 지도교수에게 전화하면 ’이제 마음 정한거니, 마흔 정도까진 괜찮다, 박사만 하면 회사다니면서 할 수 있게 하루에 수업 다 몰아주마‘ 이러신다.

대학원 실적이 있으니 졸업 후 첫 직장은 국책 연구기관이었다. 무기계약직 이었는데 딱 1년만 채우고 그만뒀다. 이슈는 있었는데 너무 개인적인 이유고 중요하지 않아서 생략.

두번째 직장은 국내 최고 대학의 한 연구기관이었다. 여기는 2년 2개월 정도 다녔다.

그 이후로 현 직장 정규직 경력에 지원해서 6년째 다니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건 이부분이다. 이 말하려고 글이 길었다.

난 지금 지방에 산다. 평생 서울만 살아왔던 서울촌놈이 경기도도 아닌, 더 남쪽으로 내려와 살고 있다(대전 세종 아님).

처음엔 KTX를 타고 3년 남짓 통근했다. 도저히 지방에선 살 수 없겠더라. 고용안정성과 치열하지 않은 회사 생활, 그리고 전국 최고라 할 수 있는 육아복지만 보고 내려온 국가기관이다보니 지역에 정도 못붙이고 퇴근하면 올라가기 바빴다. 그러다보니 동료들과도 친해지지 못했다.

그런데 애가 태어나고 생각이 바꼈다.

난 애가 태어나면 당연히 목동으로 돌아가려했는데 막상 그때가되어 돌이켜보니 내 학창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못하는 공부 잘하는 척하기도 힘들었고(내 외모가 공부 잘하게 생긴 외모라 매년 신학기마다 반 1, 2등이 경계함), 이동수업 시간에 느끼는 자괴감으로 인해 자존감도 매우 낮았다.

물론 지금도 만나는 인생친구들을 얻었지만(다들 좋은 직장 다니며 잘 살지만), 그럼에도 당시엔 매일 눈뜨는게 힘들었다. 자퇴도 고민했었고.

자살을 생각해본적은 없긴한데, 한없이 우울했던적은 많았다. 학사 졸업 후엔 누구보다 내 전공은 잘할 자신 있는데 학벌이 낮으니 서류에서 수십 수백번 떨어지고, 괜한 분노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그렇게 학벌만 보고 뽑으니 망하지(날 떨어트린 회사의 실적이 좋지않다는 기사 같은걸 보면) 라며 자위한 적도 많았다(ㅂㅅ같은거 압니다).

근데 내려와보니 삶의 길이 참 다양하더라.

지역에 있는 기관에는 지역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이름도 처음 들어본 대학도 있었다. 물론 개인의 능력 때문에 일을 처리하는 속도나 디테일함의 차이는 있지만, 그게 학벌탓은 아니더라.

그리고 지역에는 기관이 무지하게 많다. 진짜 엄청나게 많다. 정부부처 공공기관, 공기업, 지자체 출자출연기관 등 서울살고 관심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놀랄정도로 많다.

공무원법을 적용 받다보니 서울에 살든 경기도에 살든 여기에 살든 월급은 비슷하다. 아내도 같은 직종은 아니지만 국가의 녹을 받다보니 서울에서는 살기 힘든 수준의 맞벌이 월급일지라도 여기서는 나름 여유롭고 풍족하게 산다. 애 하나 키우기엔 부족함 없을 정도. 차도 드림카로 사고, 해외나 한번 갈까 싶으면 나갈 수 있는 그런 삶. 뭐 사먹을 때 가격 걱정 안하는 정도의 삶. 애한테 해주고 싶은데 못해주는거 없는 정도의 삶. 딱 그정도.

그 이유는 집값에 있다. 서울 평균값의 1/3 정도 되는 돈으로 집을 사니 훨씬 여유롭게 살게되더라.

난 우리 애가 공부에 뜻이 있다면 하고, 아님 지방 거점 국립대를 가든, 혹은 기술 같은걸 배웠으면 싶다. 여기 사람들은 서울 사람들처럼 치열하게 살지 않는다. 내려온지 4년째인데 이젠 서울 출장만 가면 사람에 치여서 지하철만 타도 지친다. 첫 직장이 판교여서 목동에서 통근했는데 그 시간과 그 거리를 어찌 다녔나 싶다. 여기선 대부분이 직주근접이다. 길에서 버리는 시간이 없으니 그만큼 가족과의 시간이 늘어난다.

지금도 본가가 목동이라 종종 가보면 <초등 의대반> 같은 간판이 여러개 보이는데 보고나면 마음이 이상하다.

개인의 선택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나처럼 사는 사람도 있고, 월 천만원, 연봉 일억은 못벌어도 지방에서 둘이 벌어 칠팔백으로 잘 살 수도 있다.

대학원을 가지 않았다면 지금의 삶을 살진 못했을꺼다. 그래서 날 정말 잘 가르쳐준 지도교수도 내 인생을 바꿔준 분이라 생각해서 아직도 연락하는거고.

대학이 인생의 끝은 아니더라. 치열하게 경쟁하며 대기업 혹은 전문직 자격을 따고 수억 받으며 사는 삶도 있지만 이런 소소한 삶도 있다는거.

대학 못가도 대학원이 있고 방통대도 있고 인생을 바꿀 기회는 충분히 많다는거. 모두에게, 특히 자녀를 키우는 이시대의 나와 같은 부모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출처 - 블라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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