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정사에서 이례적으로 특별 대우를 받았던 두 사람
삼국지 정사는
서진의 진수(陳壽)가 짓고 남조 송나라의 배송지(裴松之)가 주를 달아 내용을 보충한 삼국시대의 인물들을 다룬 역사서로, <위지(魏志)> 30권, <촉지(蜀志)> 15권, <오지(吳志)> 20권, 합계 65권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정사인 24사중 하나이며, 특히 ≪사기≫,≪한서≫,≪후한서≫와 함께 전사사(前四史)로 분류된다.
이런 책임. 꺼무위키 펌.
일단 이 진수란 사람은 스승이 초주고, 촉나라에서 벼슬을 한 적도 있음.
일단 근본이 촉나라 사람.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 사마염의 명령으로 역사서를 편찬해서 사마염에게 올린게 바로 삼국지 정사.
참고로 촉나라 출신이란거 때문에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설도 많았는데, 이 사람 아들 아니라는게 정설.
이게 왜 진식 아들이라는 말이 많이 퍼졌나면, 우리나라 유일한 정사 번역한 책인 김원중 교수가 쓴 정사 번역본에도 진수가 진식아들로 소개돼서.
한동안 우리나라에선 진수가 진식 아들이어서 제갈량에 대해서 악감정이 있었다는게 정설처럼 여겨졌음.
근데, 일단 김원중 교수가 쓴 정사에 본편 들어가기전에 서문에 진수가 정사 쓰면서 사마염에게 올렸다는 글 보면, 굉장히 신기한게 적혀있음.
<진수가 사마염에게 쓴 글>
-----신 진수 등 상주하여 말합니다. 신이 이전에 저작랑으로
있을 때, 시중.영중서감.제북후 순욱, 중서령.관내후 화교가 상주하여 저로 하여금
촉나라 승상 제갈양의 일을 정리하도록 했습니다.
제갈양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보좌하고 요충지에 의지하고 위나라에 투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보존하고 있는 그의 언론은 유실됨이 없는데, 이것은 실제로 위대한 진왕조의 광명이며
은덕이 지극하여 천하에 미친 결과로서, 옛날 이래로 이와 견줄 만한 조대는 없었습니다.
중복되는 것은
제외시키고 같은 종류의 문장을 나란히 놓아 총 24편으로 정리했는데, 편명은 위와 같습니다.
<중략>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폐하께서는 고대의 성왕을 잇도록 노력하며, 호탕하게 꺼리는 것이 없도록 하였기 때문에
비록 적국의 비방하는 말일지라도 그 원문을 완전하게 보존하여 바꾸거나 피한 것이 없음으로써 넓게 통달한 이치를 나렸던
것입니다. 저는 삼가 제갈양의 저작을 초록하여 위의 것을 저작국에 주었습니다. 신 진수는 두렵고 불안합니다.
폐하께 머리를 조아리고 조아립니다.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죽을 죄를 저질렀습니다.
태시 10면(274) 2월 1일 계사, 평양후 상 . 신 진수가 상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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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띠용
진수가 제갈량을 싫어해서 안 좋게 썼다는 인식이랑 정 반대로, 제갈량에 대해서 엄청 후빨하면서.
제갈량을 후빨해서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죄송하다면서 표문을 올림.
김원중본에선 이걸, 제갈량이 진수의 아버지를 죽였는데도 진수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면서.
제갈량이 대단하다고했지만, 일단 진식이 진수의 아버지인건 사실이 아니니 패쓰.
다만, 진수의 스승인 초주는 제갈량에게 면전에서 까인적이 있던 사람인데 그 제자인 진수는 제갈량에게 꽤나 호평을 해줌.
물론 초주 역시도 제갈량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평가하긴 했음.
그리고 이걸 받은 사마염도 충신을 고평가하는건 당연하다고 쿨하게 넘겨버림.
제갈량은 어떻게보면 사마씨의 숙적이었고 사마의가 제갈량 때문에 망신을 당한적도 있었는데도 사마염은 쿨하게 넘김.
오히려 그 이후로도 사마염이 제갈량 평가한거 보면
사마염은 " (제갈량이) 자신을 보좌했다면 오늘의 고생은 없었다" 라며 재상으로서의 제갈량을 칭찬했다 (諸葛亮伝・裴注所引『漢晋春秋』)
이라면서 제갈량을 후빨하기 바쁨.
제갈량이 지은 서적을 연구하게 한다거나, 팔진도를 연구하게 한다거나, 제갈량 충섬심을 본받으라고 한다거나.
적국의 재상이었고, 할아부지 라이벌이었던거에 비하면 이상할 정도로 후빨받는데.
그 이유는, 일단 이미 삼국이 통일된 이상 적국의 재상이지만 제갈량의 충성심은 수하들 정훈 교육하기에도 좋고.
무엇보다 제갈량은 사마의의 숙적이지만 동시에 사마의에겐 둘도 없는 은인이기 때문.
조조의 덕분에 유비가 성장할수 있었던것처럼.
사마의는 조조에게 밉보여서 눈밖에 난데다가 뿌리도 힘 떨어진 청류파.
조비한테는 이쁨 받았다지만 이미 자리 잡은 개국공신에 비하면 끗발이 한없이 떨어진 상황.
이런 상황에서 사마의가 정계의 중심에 올라설수 있었던건 제갈량의 북벌 덕분이었고.
사실 제갈량은 사마씨 가문에겐 어찌보면 성장할수 있는 기회를 준 은인임.
사마의가 제갈량 사후에 추격하다가 진영이 괜찮은거보고 쫄아서 퇴각해서 사람들에 비웃음을 당했지만.
"산사람 생각은 읽어도 죽은 사람 생각은 어찌 읽음?" 하면서 웃어 넘긴적 있는데.
사마의 속마음은 아마 '제갈량이 잘났지만 이미 죽었고, 나는 살아남았으니 승자' 아니었을까 그러니 이런 여유가 나왔을듯.
어찌보면 고마운 존재인 제갈량이기에 사마염에게도 끝까지 고평가 받을수 있었고.
또, 제갈량을 버프 시켜줘야 자기 할아버지인 사마의가 그만큼 빛날수 있으니까 진수의 제갈량 후빨은 큰 문제 없이 넘어감.
또 한사람 정사에서 이례적인 대우를 받았던 사람은
바로 이 사람. 누상촌 돗자리파 두목.
선주는 홍의(弘毅-포부가 크고 굳셈), 관후(寬厚-너그럽고 후함)하고 지인(知人-사람을 알아 봄), 대사(待士-선비를 잘 대우함)하니 한 고조의 풍도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던 것 같다. 나라를 들어 제갈량에게 탁고했으나 심신(心神-마음)에 두 갈래가 없었으니 실로 군신(君臣)의 지공(至公-지극히 공정함)함은 고금의 성궤(盛軌-아름다운 본보기)다. 기권(機權-기지와 임기응변), 간략(幹略-재능과 모략)은 위무제에는 미치지 못해 이 때문에 그 영토는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저들의 기량으로 필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헤아리고, 오로지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다 말할 수 있겠다. - 진수
역시 꺼무위키 펌.
위무제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꺾이지 않고 남의 아래에 있지 못했다. 한고조의 풍도를 갖췄다. 등등.
굉장히 후한 평가를 함.
일단 '영웅이긴한데 조조보다는 초큼 못했어여'라는 평이긴한데
여기서 의미심장한 부분이, '유비는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고 저들의 기량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리란걸 헤아리고'란 부분을 보면.
유비가 조조의 밑에 있었던 적이 있었던걸 생각하면, 조조가 유비를 받아들일 그릇이 아니었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것과 같아서.
또 당대에 지어졌던 영웅기를보면 유비가 초창기 반동탁 연합군 시절에 조조 밑에서 객장 노릇했다는 부분도 있어서.
정사에는 따로 언급이 없지만, 유비가 가장 먼저 신세진 군웅이 공손찬이 아니라 조조일수도 있다는걸 생각해보면.
두번이나 조조 밑에 있다가 그 밑에서 벗어나려한 유비를 언급할때 그들이 유비를 받아들일 그릇이 아니라고 평가한거보면 애매한 평가긴 함.
또 한고조에 빗댄게 재밌는게, 실은 유비를 한고조에 가장 먼저 빗댄 사람이 진수가 아니라.
바로 이분임.
이분이 조조 아들내미인 조식과 키배를 뜬적이 있었는데.
ㅋㅋ 유비 씹무능한 새끼. 유비는 부하 잘둬서 왕된 유방같은 놈임. 우리 아빠는 광무제 같은 사람 킹왕짱.
지랄 ㄴㄴ. 한고조가 조금 모자란 덕분에 주위 신하들이 능력을 펼칠수 있던거임.
아 ㅋ 물론 우리 왕은 한고조처럼 주위 인재도 잘 살리는데, 능력도 광무제에 버금감.
두 사람 키배에 이용당한 두 사람이 사실 중국사에서 손에 꼽히는 영웅에 두 사람 모두 유비 조조에 씹 상위호환인걸 생각하면.
후손들 키배에 농락당한게 피꺼솟할 두 사람인데.
어쨌건 여기서 유비를 한고조에 비교한건, 그 이전 한고조 vs 광무제 키배를 봤을때.
진수가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꽤나 의미심장한 부분이긴 함.
뒤에선 위무제보다 못하다고 살짝 변명거리를 달아놓긴 했지만 조조 vs 유비의 평가를 간접적으로 떠넘긴 느낌이라서.
진수가 제갈량과 조식의 키배를 알았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지만, 제갈량에 대한 서적을 모두 정리한 진수라면 아마 알았을 가능성이 크고.
위진 정통성을 주장해야 되는 역사서에 대놓고 유비를 고평가할순 없지만 어느 정도는 조조를 높이면서 유비를 고평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달아놓은 복선일수도 있겠다 생각이 듬.
이런 평가를 떠나서 유비를 아예 대놓고 특별취급한 부분이.
사람 죽을 때 지위에 따라 쓰는 한자가 다른데
황제가 죽는 것을 붕(崩)이라 하고, 제후(諸侯)는 훙(薨), 대부(大夫)는 졸(卒), 사(士)는 불록(不祿) 잡졸은 사(死)란 표현을 씀.
손책은 오나라에서 왕호는 받긴 했지만 오나라는 비정통이니 '졸'